詩心佛心

천수사에서 우연히 회문시를 쓰다

강석근/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


(1)

深庵夜寂靜談玄  깊은 암자에서 밤늦도록 논하던 현담이 조용해지니

冷篆香殘斷穗烟  차가운 전향 조각에서 피어오르던 향연도 끊기었다.

心似月淸肌似鶴  마음은 달과 같이 맑고 몸은 학처럼 야윈 채  

書書入妙養天全  그윽하게 묘한 경지에 들어 온전한 천성을 기르네


(2)

玄談靜寂夜庵深  고요한 현담이 잦아지니 암자의 밤은 깊어가고 

烟穗斷殘香篆冷  이삭처럼 피던 향연은 끊기고 전향도 싸늘히 식었네

鶴似肌淸月似心  기골은 학처럼 맑고 마음은 달처럼 밝은데

全天養妙入書書  천성을 묘하게 기르려고 그윽한 경계로 들어가네   

<동국이상국집, 전집 3권, 天壽寺偶書廻文, 2수 중 첫 번째 작품>


이 시는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천수사(天壽寺)에서 우연히 회문시(廻文詩)를 쓰다”라는 작품이다. 회문체(廻文體)는 유명시인들이 시적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가끔씩 지었던 한시의 다양한 시체 중 하나이다. 앞에서 읽어도 시가 되고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그 의미가 통하기 때문에 회문체라 불리는데, 한자의 표의문자로서의 특성이 이를 가능케 했다. 회문시의 특징은 어디서부터 읽느냐에 따라 시적 의미가 달라진다. 어디에서부터 읽느냐에 따라 시어 배열이나 해석 순서가 달라지기 때문에 읽는 방식에 따라 회문시는 시적 뉘앙스와 분위기가 상이하다. 그러나 주제와 내용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위 작품을 (1)번처럼 앞에서부터 읽어보고 또 (2)번처럼 뒤에서부터 읽어보면, 세부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으나 시의 주제나 이미지까지 바뀐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경기도 개성에 있던 천수사를 선적(禪的) 공간으로 형상화시키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한시는 앞부분에서는 경치를 읊고 뒷부분에서는 시인의 서정을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 시도 이런 논리를 잘 따르고 있다. 기·승구는 천수사가 처해 있는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서술하였고, 전·결구는 이 사찰의 종교적 환경에 동화된 시인의 정신세계를 노래하였다. 스님과 속객 사이에 오가던 고차적 대화도 밤이 깊어지면서 잦아들었고, 법당에서 꼬불꼬불 피어오르던 향연도 이제는 끊어졌고 향로도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스님의 법문과 묘한 사찰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마음은 달처럼 맑고 몸은 학처럼 야위어”버린 시적 화자는 인간적 욕심까지 초탈한 도인이 된 듯하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선정(禪定)에 들어 자신의 천성을 찾고자 했다. 인간은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음과 헛된 욕망에 때문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잃은 채 살아가는 존재인데, 이 시에서 천수사는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깨침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시는 우리에게 사찰의 기능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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