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계율의 정신에서 본 삼귀의와 오계
혜남 스님/ 통도사 강주
삼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고 더구나 94년도나 98년도와 같이 종단 분규가 일어나 종단 스님들이 불교 신도로부터 혹은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때가 되면 흔히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우리가 목숨 바쳐 귀의할 수 있지만 스님에 대해서는 귀의할 수 있느냐, 스님들이 우리의 귀의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의할 때 삼보라고 하는 것이 어느 선까지를 얘기하는 것인가를 계율의 정신과 연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화엄경을 해석한 청양국사 진관의 해석을 보면 이 삼귀의를 하는 것은 외도의 삿된 교주, 삿된 가르침, 삿된 무리로부터 벗어나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 그러니까 이 승가에 귀의함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 삼보는 뭐와 같으냐하면 부처는 의사와 같고, 법은 약과 같고, 스님은 간병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병이 많은 중생들을 잘 간호해 주는 이런 사람을 스님이라 했습니다. 간호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청량국사 자신이 쓴 귀명례 승보 부분에서 보면 문수·보현 제대사라 ‘문수·보현과 같은 모든 대사에게 귀의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문수·보현 하면 사실 부처님의 좌우 부처로서 부처님과 거의 같은 위치에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이 분들은 스님들입니다. 부처님 빼놓고 문수·보현·관음·지장 이런 분들은 다 승보입니다. 이걸 우리가 생각 안하고 승려들이 뭐 한다고, 승보는 귀의의 대상이 안 된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귀심론에 처음 귀명례를 보면 여실수행등이라 했 습니다. 무량공덕장 여실수행등이라. 무량한 공덕장을 여실히 수행한 분이다. ‘승’은 비구계 받으면 다 ‘승’입니다. 그믐날과 보름날 포살을 하는데 그 때도 승보 부분을 보면 일체성승이라. 성인 ‘성’ 자, 스님 ‘승’자. 일체 성승이 성보에 들어가지 아무나 승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양보해서 조선시대에 나온 의식집을 보면 보살·연각·성문승 한 곳이 있고, 일체 현성승이라고 한 곳이 있습니다. 어질 ‘현’, 그 정도는 승보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만 깎았다고 다 승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현실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지금 과연 그런 현성승이라도 몇 사람이 되겠느냐, 요즘 이른바 선지식 소리를 듣는 사람은 그런 경지에 갔느냐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니까 조금 궁한 이론으로써 주지삼보라는 것이 나옵니다. 주지삼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머물러 주하는 분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지금 열반에 드셨으니 대신으로 불상을 모시고 부처님처럼 예배를 올리고 있습니다. 법도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신 그게 법이지만 지금은 팔만대장경등의 불서가 대신합니다. 그것이 경장이니까 법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스님은 무엇이냐. 일단은 비구계를 받은 사람,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은 현존해 있는 승가입니다. 그러니 승복이라도 입었으니까 존경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님이 스님답지 않은 스님도 있고, 또 실지는 거사님이나 보살님이 수행을 더 잘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반면 승복을 입고 존경받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진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동체삼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체중생은 다 삼보승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보승이라는 것은 심청정이시불이라, 우리 마음 깨끗한 그것이 바로 부처다. 심광명이시불이라, 우리 마음에 밝은 것이 법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맑고, 밝게 가지면 불법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승’은 전광무예라. 마음이 항시 맑고 밝아서 일체 걸림이 없이 어디에 가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승’입니다. 그러니 사회가 신명을 경시하고, 혼탁하고 해도 이 대안으로써 모든 국민이 삼보승에 귀의하면 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도, 불교대장경을 읽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맑고, 밝게 화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삼보만 하면 사실은 부처에게 귀의함이 되는데 왜 그러냐를 계율의 정신에서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계’라는 것은 좋은 습관을 스스로 들이는 겁니다. 습관이 들면 그러한 행동을 계속하는 겁니다. 나쁜 습관성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키우자 하는 스스로에 대한 맹세입니다. 거기에는 전혀 강제성이 없습니다. 죽이지 말아라, 사음하지 말아라 이렇게 명령조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계 받는 사람이 스스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맹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도가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구·비구니가 계를 범하면 다릅니다. 그것은 계가 아니고 ‘율’이기 때문입니다. 신도들은 계만 있지 율이 없지만, 비구는 계·율이 있습니다. 비구는 같이 참선하고 모든 행동을 같이 합니다. 즉 대중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타율입니다. 어기게 되면 오편칠취라고 해서 다섯 조목, 혹은 일곱 조목으로 그 벌을 받게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비구 250계나, 비구니 348계는 계가 아니고 바라제 목차 반드시 배워서 알고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율입니다. 그런데 왜 한역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율이라 안 하고 250계, 348계라 해서 ‘계’라고 하느냐. 그것은 번역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잘 된 것입니다. 승려는 율을 지켜야 하는데 율이 망하면 불법이 망한다 했습니다. 율은 타율인데, 타율에 의해서 억지로 지키는 것보다 스스로 자신의 맹세에 의해서 지켜 가는 것이 참다운 계율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계율에 대해서 굳이 말하자면 ‘계’쪽이 더 중요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계의 정신에서 율을 지켜라 그런 뜻으로 마땅히 율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계라고 쓴 곳이 많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우선 우리가 불자가 되려고 하면 삼보에 귀의해야 하는데 진정한 삼보라고 하면 불법은 다 아는 것이고, 승은 승복을 입은 스님은 일단 존경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님들이 너무 오만해지거나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동체삼보설에 대해 앞서 언급했습니다. 동체삼보설에서 볼 때에는 마음 깨끗한 것 그게 바로 부처이고, 우리 마음이 밝은 것 이것이 바로 법이고, 맑고 밝아서 어디에 가나 걸림이 없이 화목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스님입니다. 이런 성격은 모든 사람이 다 있으니 삼보승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계는 타율적인 것이 아니고 자성이니까 스스로 죽이지 않으므로 해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스스로 훔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누어 갖고 더불어 살고, 또 스스로 사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깨끗한 행, 윤리적으로 깨끗이 살고 또 거짓말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바른말, 부드러운 말하고 이렇게 하면 아주 화목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술 마시지 않음으로 해서 지혜를 키워가고, 죽이지 않음으로 해서 자비종자를 키워가고, 훔치지 않음으로 해서 복덕종자를 키워가고, 사음하지 않음으로 해서 청정종자를 키워가고, 거짓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진실 종자를 키워가고, 이렇게 삼귀와 오계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지금 세속에서 일어나는 생명경시 풍조라던지 각종 부정부패는 같은 나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삼귀오계를 잘 지켜서 훌륭한 불자님들이 되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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