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 근원을 찾아 떠나는 구도 여행

전유진 / 인도철학과 4학년

인간은 진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인간은 진리를 어떠한 식으로 표현하든 항상 완전히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표현하려 해도 진리는 미묘하게 빠져 나간다. 진리는 특히 언어적인 묘사의 범위를 간단하게 벗어난다. 진리를 표현하려고 사용하는 말에는 진리를 담을 수 없다. 진리를 언어로 묘사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한계에 부딪힌다. 마치 본질적인 것은 빠지고 비본질적인 것만 표현된 느낌이다. 선의 십우도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먼저, 십우도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면 십우도는 원래 팔우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팔우도는 불교가 아니라 도가의 것이었다. 이 그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누가 제일 먼저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러 중국의 곽암 선사가 이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는 다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림 두 개를 더하여 십우도로 만들었다. 도가의 그림은 여덟 번째 단계에서 끝난다. 여덟 번째는 공(空)이며 무(無)이다. 그러나 곽암 선사는 여기에 두 단계를 보태었다. 그는 무(無)에서 끝내지 않고, 두 개의 그림을 덧붙임으로써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그래서 원을 완성한다.

십우도의 첫째 그림은 심우(尋牛), 소를 찾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시작이며, 동시에 인간과 우주의 시작이기도 하다. 인간도 태어남과 동시에 아기들에게서 보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외부로 뻗치기 시작한다. 아기들은 끝없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우주는 또 어떤가? 그것의 시작에서도 우주는 외부로 퍼져나가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빅 뱅(Big Bang)과 더불어 순간적으로 뻗어 나갔고 지금도 계속 외부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찾고자 하는 것이 본질이기에, 이 시작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 귀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 본질에서 한 발짝 나오면서부터 길을 잃고 탐욕과 두려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어지럽게 일어난다.

둘째 그림은 견적(見跡),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경전에 의해 그 뜻을 알고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진리의 흔적을 본 것이다. 또한 인생에서 많은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막연한 실마리를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주로 치자면 빅 뱅의 열기가 서서히 식는 순간이다.

셋째 그림은 견우(見牛)이다. 드디어 소를 직접 발견한 것이다. 수행을 통하여 육감이 하나가 되고 진리의 문안으로 들어서 그 본질을 엿본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막연한 느낌이 생기는 시기이다. 또한 우주의 먼지들이 우주가 냉각됨과 더불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단계이다.

넷째 그림은 득우(得牛), 소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잡은 것이 아니라 소의 몸부림에 몹시 힘들어하는 순간이다. 진리를 엿보고 이제 진리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고집 센 마음이 여전히 날뛰고 야성이 남아 있어 더 강한 수행이 필요한 시기이다. 또한 자신의 꿈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그 길을 갈 것인가 마지막으로 고민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우주에 있어서는 우주의 먼지가 혼란스럽게 자신의 갈 길을 향하여 흩어지는 단계이다.

다섯째 그림은 목우(牧牛)이다. 채찍과 고삐로 우선은 소를 진정시킨 것이다. 이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진실이 되고 미망(迷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미망은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코뚜레를 잘 잡고 한 점의 의심도 일으키면 안 된다. 또한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갈 길에 진입을 하고서도 다시 한번 그 길에 대하여 고민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우주는 우주의 먼지들이 각자의 별을 형성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혼란을 벗어나 각각의 한 점으로 집중되는 단계이다.

여섯째 그림은 기우귀가(騎牛歸家)이다. 이는 더 이상의 미망이 사라지고 이제 진리와 하나가 된 단계이다. 이제는 어떠한 미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서도 더 이상의 고민 없이 자신의 갈 길에 대해 확신이 생겼다. 우주도 각각의 별을 형성하고 혼란이 정리된 상태이다.

일곱째 그림은 도가망우(到家忘牛)이다. 이제는 진리에 대한 추구도 없고 추구를 했었다는 기억도 사라진 후 인생 자체가 진리가 된 순간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모든 이루고자 했던 꿈들이 사라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꿈이 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우주는 각각의 별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 운행되는 단계이다.

여덟째 그림은 인우구망(人牛俱忘)이다. 이 단계에서는 추구하는 것도 없고 추구하려는 주체에 대한 관념 모두가 사라진 단계이다. 인생에 있어서는 죽음에 해당한다. 우주에 있어서는 별들이 노화되어 블랙 홀이 되는 시기이다. 이 단계가 바로 공(空)이고 무(無)이다.

아홉째 그림은 반본환원(返本還源)이다. 이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원래의 본질로 돌아간 단계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죽음 후에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우주도 블랙 홀을 통하여 원래의 시작인 한 점으로 모아진다.

열째 그림은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시 여행을 시작했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마음은 원래의 시작과 전혀 다르다.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그 속에는 어떠한 욕망도 없는 행함 없는 행만이 있다. 인생과 우주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다. 인생과 우주는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회와 우주의 순환에 의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똑같은 순서의 반복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열 단계의 순서를 통하여 하나의 원이 완성되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 단계는 아주 큰 의미가 있다. 깨달음을 저잣거리로 다시 가져왔다는 것은 대중들에게도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이는 산 속에서의 깨달음은 평가받을 수 없고 진정한 깨달음은 민중 속에서만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요즘 불교가 대중 포교를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은 그러한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십우도도 언어처럼 한계가 있다. 인간의 관념을 하나의 스토리에 묶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이 이야기 그림을 넘어서 이야기 없는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넘어 음악으로 그리고 하나의 파장으로 나아가서 그것마저도 없애야 한다. 그러한 극복 속에서만 무한한 진리와 하나가 되고 그것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