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의 최후거점, 라트나기리

정승석 / 불교대학 교수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한 시기는 흔히 13세기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추정은 동인도 최대의 불교 대학으로 알려진 비크라마쉴라 사원이 1203년에 회교도의 약탈로 파괴된 데서 유래한다. 현재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의 편린만으로도 이 사원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라트나기리의 원경. 중앙 오른쪽의 탑이 앞의 사진에 있는 대탑이다.

이 사원의 중앙에는 큰 불전이 있었으며, 이 주위로 진언 사찰 53동과 일반 사찰 54동, 총 108동의 사찰이 포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 108명의 학승 외에 많은 아사리와 봉사자가 상주하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4문과 제1, 제2 중문을 당대의 일류인 여섯 학승들이 각기 관장하고 있었고,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던 아티샤 스님도 이 사원의 좌장으로 상주했다고 전한다.

동인도에서 불교가 번창한 것은 서기 750년부터 약 250년 동안 존속한 팔라 왕조의 공헌이 크다. 이 왕조는 유서 깊은 도시인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삼아 통치하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이 때 동인도의 벵갈과 칼링가까지 통치했다.

이 왕조의 전성기에 오릿사 지방에는 대승 불교가 성행하여 100여 곳의 사원과 1만 여 명의 스님들이 있었다. 앞서 말한 비크라마쉴라 사원도 이 왕조의 제2대 다르마팔라 왕이 서기 800년경에 건립했다. 밀교의 중심지가 된 비크라마쉴라 사원과 더불어 날란다, 오단타푸라, 바즈라사나는 당시의 4대 사원으로서 불교의 중심지였다. 1927년에는 소마푸라 사원이 발굴되었는데, 이 곳은 중앙에 177개의 승방을 갖추고 넓이가 사방 1마일이나 되는 대규모의 사원임이 밝혀졌다.

팔라 왕조는 세나 왕조에 의해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동인도의 대승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래에 그 간의 상식을 수정하고 동인도 불교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게 하는 대규모의 유적지들이 발굴되었다. 약 5년 전만 하더라도 외국 관광객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이 곳들이 현재는 버스로 방문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동인도는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해 갈 때 마지막까지 법등을 수호했던 지역이고, 이 동인도를 대표하는 지방이 오릿사 주이다. 오릿사 주 일대는 일찍이 칼링가로 알려졌던 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은 아쇼카 대왕을 불교도로 전향하게 한 계기가 서린 땅이기도 하다. 오릿사의 주도인 부바네슈와르 시의 외곽에는 불심의 정책을 선포한 아쇼카 왕의 마애 칙령이 아직도 선명한 각문으로 남아 있다. 부바네슈와르는 한때 1,000여 군데의 힌두교 사원이 번성했다고 하는 유명한 종교 도시이다.

불교 예술의 기교가 집약된 불상들.

부바네슈와르의사각형 구조의 사원 터.

 북동쪽으로 약 90km 떨어진 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불교 사원 단지의 유적이 발견된 세 언덕이 있다. 삼각의 단지를 형성하고 있는 이 언덕들의 이름은 라트나기리(Ratnagiri), 우다야기리(Udayagiri), 랄리타기리(Lalitagiri)이다. 이 곳들은 과거의 주도로서 부바네슈와르의 인근에 있는 커택(Cuttack)으로부터 각각 70km, 60km, 55km의 거리에 위치한다.

이 세 언덕과 그 주변은 대규모의 불교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현장 법사가 이 곳을 방문했을 적에 여기에는 푸슈파기리로 불리는 불교 대학이 번창하고 있었다. 옛적의 영화를 웅변하는 전탑, 석조 현관, 밀교 불상의 잔재와 파편들이 곳곳에 폐허로 널려 있고, 이것들은 현재도 계속 발굴중이다. 이 불교 단지의 진수를 보여 주는 곳은 라트나기리이다. 여기서 장엄하게 조각된 문설주와 완성도가 빼어난 불상은 아마도 굽타 시대 이후의 불교 조각 예술이 최대로 집결된 형태일 것이다.

세 단지 중에서 라트나기리와 우다이기리는 상당히 후대까지의 양상을 보여 준다. 키미리아 강이 라트나기리와 우다이기리를 구획하는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라트나기리와 우다이기리는 밀교의 중핵이었으며, 이 곳으로부터 불교가 인도의 다른 지역 및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믿는다.

한 군데에 모아 둔 숱한 소형의 복발탑들.

여기서 발견된 석조 파편들로 오릿사 지방에서 성행한 탄트라 전통의 역사가 깊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이것들 중에는 불교 탄트라, 즉 밀교가 포함되어 있는데, 새겨진 고서체로 보아 그 역사는 서기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서기 7세기에 이 곳은 날란다 대학의 고명한 학승이었던 사하라파다를 초빙할 정도로 금강승의 중심지로서 중시되었다. 그는 일반인들에게도 밀교의 교의를 개방하여 설파한 최초의 스승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 오릿사로부터 마하라슈트라 지방으로 가서 활동했던 사라하 스님은 밀교의 대가로서 엘로라와 서인도에 금강승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덕 정상에서 발견된 불두.

현재까지의 발굴로 드러난 라트나기리의 유적에는 한 기의 인상적인 큰 불탑과 수많은 작은 불탑들, 두 군데의 사각형 사원 터와 한 군데의 날개형 사원 터, 여덟 곳의 전당 터, 숱한 조각상과 건축물의 단편들이 있다. 이것들은 세계의 다른 중요한 불교 유적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여기서는 다른 유물들도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들은 청동제와 석조의 불상, 밀교에서 통용된 만신전의 무수한 신상이다. 언덕 꼭대기에서 발견된 거대한 불두는 초기 불상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 불상을 조성한 예술가는 반쯤 감긴 눈과 같은 얼굴 표현으로 명상에 잠긴 내적 상태를 훌륭하게 반영했다.

두 군데의 사원 터는 풍부한 조각과 건축의 웅장함으로 방문객들에게 여기가 위대한 유적지임을 실감케 한다. 풍부한 조각상과 장식 도안을 갖춘 현관의 뒷벽은 인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문틀은 녹니석으로 절묘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문설주에는 유난히 깔끔한 솜씨로 꽃과 덩굴 무늬의 띠를 조각하여, 이 같은 종류의 건축으로서는 가장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단지의 토대가 조성된 시기는 서기 5세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2세기까지 이 곳이 번성하고 있었음이 목격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는 16세기 무렵까지 존속했다. 이 기간 동안 이 곳은 불교의 신앙과 문화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1999년 1월에 필자가 촬영한 것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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