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쌓인 산사의 저녁 종소리

강석근 /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

初聞猶混瀑流寒          처음에는 차가운 폭포소리와 함께 들리더니

漸認來從岳寺間          산과 절 사이에서 점점 큰 소리로 들려오네

擊罷雲閑君莫道          종을 다 친 다음 구름은 한가하다 그대 말하지 말라

白雲爭肯有忙閑          흰 구름이 어찌 바쁨과 한가함을 다투겠는가

<동국이상국집 후집 6권, 復次韻和李相國八景詩各一首, 烟寺暮鍾>

 

고려나 조선시대의 시인들은 사찰을 배경으로 여러 편의 연작시를 남겨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다투듯 팔경시(八景詩)를 짓고 서로의 시에 차운하고 화답하면서 문학적인 유희를 즐겨왔다. 위 시는 이런 배경에서 창작된 고려시대 대표시인인 이규보의 팔경시 가운데 한 편인 <연기에 쌓인 산사의 저녁 종소리>라는 작품이다. 이 시는 동양화 한 폭을 보여주는 듯하다. 연기 이는 저녁 산사,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범종 소리는 독자들에게 신비한 산사의 감동을 복합적으로 제공해 준다.

이 시는 크게 기 승구와 전 결구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구는 청각적인 이미지가, 뒤의 구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잘 짜여진 선경후정의 구조와 청각과 시각의 대조는 시적 생명력에 탄력성을 더해준다. 기구의 문맥속에 숨어 있던 범종소리는 폭포소리와 함께 묻혀 있다가 점차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시적 화자의 발걸음이 산사와 가까워지는 상황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시적 표현이 갖는 아름다움을 더욱 증폭시켜주는 구절은 전 결구이다. 이 시구들 속에는 한 편의 선적(禪的) 대화가 무르녹아 있다. 한 스님이 범종치는 일을 마친 후에 흘러가는 흰 구름이 한가하다 평가한다. 바람에 흘러가는 백운이 한가하다는 진술은 동적인 이미지를 정적으로 환치시키는 역설적 표현이다. 아직 속진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 이들은 구름이 급하다 혹은 한가하다라고 사족을 달아가며 평가하지만 흰 구름은 생각없이 그저 무심하게 흐를 뿐이다. 독자들은 이 시구에서 어디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는 시적 화자의 무애한 정신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했고, 또한 <백운거사어록>에서 '구름은 외롭게 떠서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 않으며 나부끼며 동서로 떠다녀도 그 형체와 자취에 구애받은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시의 중심소재인 백운도 이규보에게는 단순한 문학적 소재나 표현이 아니라 그의 고차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시적 장치임이 분명하다. 이 한 편의 시를 통해 깊고 높은 경지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이규보는 분명 차원 높은 수행자임에 틀림없다.

이번 주말에는 꿀뚝에 저녁연기가 나는 산사를 찾아 범종소리의 여운을 한 번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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