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죽음 사이
박홍주
/ 불교도 연합회 회장(불교학과 3)
인간이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 가장 큰 숙제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난 가끔 해 본다.
그럴 때마다 난 언제나 한가지 답으로
그 생각을 끝마치곤 한다. 두려움과 외경심으로
끝마치며 얻게되는 죽음이라는 화두이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한없이
두려워하며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과연 사람일까? 죽음이란 것을 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훗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는 말이다. 나는 아직까지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크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을
조금은 담담히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올
초에 나는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번이
인도 여행은 두 번째이다. 처음 여행 이후
막연한 그리움을 불태우다 이번에 다시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나는 이 기간 중
약 20여일 바라나시라는 도시에 머물렀는데,
그 곳은 흔히 '어머니의 강'이라고 불리는
갠지스강 유역의 도시로 힌두교의 성지
중 한 곳이다. 이 곳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란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죽음조차도 떠나지 못하고 머무는
곳이 바로 이 도시이다.
이곳의
아침은 언제나 뿌연 안개와 함께 시작한다.
아마도 강을 옆에 끼고 있어서 인지 모른다.
특히 겨울철에 이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래도 언제나 아침이 되면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과 이 떠오르는 해를 한번쯤
보려는 관광객들로 강어귀는 항상 붐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 이 곳 골목길에
한시간 가량 앉아 있다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이 장례행렬이다. 시체 한 구를
올려 메고 줄줄이 줄을 서서 향을 피워가며
화장터로 향해 바삐 걸어가는 모습 말이다.
입으로 하나같이 리듬을 맞추어 한소리를
내뱉는다. '나무 나무 삳다해'라는 소리를
연신 내뱉으며 별로 슬플 것 없는 모습으로
서둘러 골목길을 지나간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무 나무 삳다해'란 말은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가다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너무 너무 섭섭해'라고 들리는 것은 왜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나도
모르게 그 행렬의 일원이 되어 그 행렬
뒷켠을 채우고 따라가게 되었다. 한참을
서툰 길을 비틀거리며 아무 느낌 없이
멍하니 따라가다 메케한 연기로 뒤범벅된
강어귀에 다 달았다. 나는 거기서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었다. 너른 공터에
빼곡이 들어찬 시체들과 그 시체들이 타
들어가는 메케한 연기로 뒤범벅되어 가득
찬 그곳의 모습이 내 눈과 뇌리 속에 강렬한
충격으로 들어온 것이다. 단 한 순간이지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멍하게 따사로운 햇볕과 연기
속에 나도 모르게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그곳의 어떤
사람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게 순간 떠오른 생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생소한 모습에 우리와
다른 풍습이겠거니 하면 될 것을 나는
왠지 모를 심한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과연 죽음일까,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이것이 아닌데, 모두가 나의 죽음을
슬퍼해 주고 기억해주는 그런 것이었는데
이건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순간
혼란에 휩싸였었고 한참을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연기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곳에 그렇게 앉아 있다보니
그 연기 자욱한 하늘이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지. 그러다 또 한없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아름답다기
보다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는 막막하지만
그런 것과 비슷했던 것 같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슬퍼 보이고 너무나 슬프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것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그만 접고 정신을 차리고 주위
사람 중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았다. 당신은 이 광경이 슬프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때 그 사람의 "왜
슬퍼해야 하는가? 그는 이제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 간 것이고 이 영광스러운
어머니 품속에서 죽음을 맞은 것인데,
그리고 또 그는 언젠가는 돌아 올 것인데
왜 슬프지?"라는 대답을 언뜻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 날로 며칠동안 그 화장터에
나가서 연기와 하늘을 번갈아 보곤 했었다.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죽음이 한없이
두려운데 왜 그 죽음을 보고 있는 그들은
슬프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은 걸까, 내가
한참이나 잘못 돼서 그런 건 아닐까...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을 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조금은 죽음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느낀 것은 죽음은 슬픈 것만이
아니란 것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나와 같은 생각은 할 수 없기에
여타의 것을 이야기하진 않겠다.
이
말이 사족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까지
죽음이 두렵다. 아니 이제는 단순히 두려운
것만은 아닌, 단지 내가 아직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못 본다는
짧은 생각이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사람은
윤회를 한다고 말한다. 언뜻 이야기하기에
윤회를 한다면 전생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내세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데 왜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윤회를 하는
주체는 진짜 내가 윤회를 하는 것이며,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는 진짜 나를 깨닫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 윤회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죽음도 영원한 사라짐은 아닐 것이다.
그러게 생각하면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하려는 말은 윤회에 대한 자각이다.
사실 윤회란 것을 깨닫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다. 딱히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명확히 뭐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정말 어렵다.
또한 내가 하는 이야기도 내가 윤회란
것을 깨닫고 죽음을 초월하고 그런 사람이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사유하는
동물로서 최고의 명제인,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해서 조금은 생각 해보자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모든 이가 다시 한번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좋은 방향의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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