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임의 미학
오태석
/ 중문학과 교수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중국은 역사적으로
유구하고도 풍부한 문화유산을 지닌 나라이다.
오늘날은 서구 과학과 합리주의가 세계의
지배 정신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실상
15세기까지 서구의 과학과 문명이 중국에
비해 후진적이었다는 점은 일면 의외스럽기도
하나 사실이다. 현재 중국은 세계 인구의
인 13억의 인구와 함께 영토 면에서도
몽고시대를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최대이다.
어디 그뿐인가? 1980년대 이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여 온 중국의 경제는 세계의
공장으로 변모하면서 경제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로 부상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렇게
강력한 중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답은 그리 쉽지 않다. 전문가는 많지만
쉽사리 한눈에 잡히질 않는 것이다. 중국은
동양 문명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이민족의
침략 또한 적지 않게 받았다. 아놀드 토인비는
국가의 문명사적 패러다임을 '도전과 응전'으로
해석했는데, 중국의 역사 역시 이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이 그토록 강력한 국가적
저력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중국문학 전공자인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여러 민족 문화가 부단히
중국의 땅에 들어오며 부단히 교류한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 점은
다민족국가인 미국의 경우에도 그 유사성이
보인다. 유사이래 중국의 영토는 장기간
흉노, 거란, 여진, 몽고, 만주족 등 북방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거나, 그 여파로
남쪽에 반쪽 왕조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주류 민족인 한족(漢族)
문화가 지배 민족을 포함한 주변 민족의
문화를 포용 섭취하며 자기 주체성을 유지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중국은
많은 민족과 문화가 계속 섞이는 가운데
오히려 그것을 발전의 초석으로 삼으며
자기 정체성을 키워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그들 민족 문화의 주체성과
함께 부단한 자기 혁신을 통해 가능했을
것이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는 이치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섞임의 미학이며
어울림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이러한 섞임의 양상은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우선 인구 대국 중국에는 한족을 비롯한
56개 민족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심 종족인 한족은 91.59%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12억 이상의 인구가 단일한
민족이라는 말인데,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역시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민족 간의 섞임의 구심력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각종
문화 역시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와의 교섭과
자기화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어찌
보면 우리가 중국의 인접국으로서, 인구,
문화, 경제의 강력한 자기장 속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켜나간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섞임의
미학은 필자의 전공 분야인 중국문학 분야에서
더 잘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문화예술은
이민족 음악 미술의 수혈을 받으며 결국
자기화하여 창출해낸 과정의 연속이다.
한대와 육조시대의 악부민가(樂府民歌)와
돈황(敦煌) 사본에서 보이는 민간사(民間詞),
그리고 원대(元代) 몽고족 음악의 영향을
받은 산곡(散曲) 및 청대 각 지방의 민간
음악이 그 예이다. 또한 소설적 측면에서도
각종 민간 고사와 변문(變文)에 보이는
이야기 구조들이 그렇다.
종교와
사상 방면에서 볼 때 중국 고유의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양대 축으로 발전해 나가던
중국의 문화는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를
맞이하면서 이전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사유의 성숙을 보이게 된다. 후한대까지
중국의 불교는 유입 초기의 기층적 단계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중국화의 길을 걸어나갔다.
특히 위진남북조(221-580) 370년간의 남북
분열기에는 유교 중심의 통일적 이데올로기의
빈자리를 현학(玄學)과 불교가 자연스럽게
메워나가며 기존의 중국문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특히 불교는 사유
방식 면에서 유사성을 지닌 도교적 사유와
교감하였고, 인위적 설정 위주의 유가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작용하며, 그
전파와 감염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선종의 성립과 함께 포교 기반도 민간에서
지식인 사회로의 확산과 함께 토착화하였으며,
이후 송대에는 문인 관료로서 선학의 소양을
쌓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지식인 사회의
교양 과목이 되었다. 결국 전통적으로
중국의 주류 사상이었던 유학 역시 선학(禪學)과
노장(老莊)의 많은 부분들을 수용하여
성리학으로 다시 태어나며 활로를 모색해나갔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시인이 다스리는
시의 나라였다. 이 점은 서구 사상의 원류인
플라톤이 시인 추방론을 내세운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당나라의 과거제도에서 경전
실력을 가늠하는 명경과(明經科)보다 시작(詩作)
능력을 보는 진사과(進士科)의 지위가
더 높았던 것 역시 중국 전통의 '시 중심주의'에
다름 아니다.
공자(孔子)이래
중국에서 시(詩)는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자
개인적 사회적 자아 표현의 훌륭한 도구로
작용해 왔다. 그는 "시를 모르는
사람하고는 벽을 맞대고 있는 것과 같다"거나,
"시를 모르면 세상에 나아가서 행세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유가에서
시의 사회 정치적 효용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실상
중국의 언어와 문학은 사유와 형식 및
표현 면에서 지속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실상 중국 최초의 한자음 표기
방식인 반절법(反切法)은 범어(梵語)의
영향이다. 또한 중국시의 절정인 律詩의
완성은 불경의 번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시에 사용된 한자는 표의성, 단음절성,
고립어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음성적
속성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 것은 육조시대
구마라지바(鳩摩羅什)등이 불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인도어의 표음미에 매력을 느끼고
중국의 음운 체계에 주의를 기울인 결과였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율시의 대표적
작법인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은 그 심미안의
제도적 결실이다.
사령운(謝靈運),
왕유(王維),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 100여명이나 되는 유명 시인들이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이론 면에서도 채움이 아닌
비움[空]의 미학을 키워내어 문예의 인식
지평을 심화 확대하였다. 회화(繪畵)에서
전신(傳神)과 오입(悟入)의 경지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唐詩)의 세계는
회화적 정감 세계를 중시하였으나, 송시는
철학적 사색을 중시하고 내적 수양이 개재된
평담풍(平淡風)을 지향했는데, 이 역시
"시 배우기를 선(禪) 배우듯이 해야
한다"는 당시 선학(禪學)의 영향이다.
한편
20세기초 돈황(敦煌) 석실(石室)에서 발견된
수많은 필사본과 그림들은 중국 문학사를
새로 쓰게 만든 역사적 발견인데, 그 중심에는
불교가 자리하고 있다. 불교 이야기의
강창(講唱)에서 시작된 변문(變文)과 후대의
보권(寶卷), 송대의 백화체 설경(說經)
화본(話本) 등이 모두 불교문학의 구체이며,
후에 서유기(西遊記)등 역대 통속문학의
풍부한 상상적 세계가 다양하게 각색되고
재생산되는 구조를 가져온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의 문학 세계는 새롭고도 풍성한
결실을 맺었으며, 그 여파는 주변의 한국과
일본 문학에까지 미쳤다.
중국인과
얘기하다 보면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자기 발전적인 문화 전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는데, 실상 그들의 문화 역시 본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대로 불교를
비롯한 종교, 문화, 사상 방면의 적극적인
수용과 부단한 자기화의 소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문화 전통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는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민족이다.
중국을 지배했던 대제국 몽고나 만주가
자기의 문화를 상실한 경우를 보면, 우리가
잦은 외환(外患) 속에서도 단일성을 유지하며
민족 주체성을 지켜온 것은 민족적 자부심을
느낄 만한 가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화 수용의 주체적 섞임과 자기화에 있어서도
진정한 어울림의 정신이 있었는가 하는
부분은 되새겨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반성도 함께 요구된다.
요즘
외국인 노동자의 자진 신고와 관련하여
만기 노동자의 체류 기간 연장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바로
30여년전 우리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가족과 국가를 떠나 미국과 독일과
월남과 사우디로 나갔듯이, 이 땅에 있는
외국인근로자들 역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이 땅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이중 상당수는 바로 우리의
형제인 중국 동포들이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필자 역시 서구에서의 생활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간혹 은근한 차별감을 지우지
못했던 기억이 없지 않다. 지하철이나
작업장 또는 길에서 이들에게 따스한 시선과
작은 친절 하나는 앉아서 우리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요, 나의 개별 세계를 사방의
한 세계로 체현하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구현에 다름 아니다. 이제 겨울 추위가
매서움을 더하고 있는 연말을 맞아 빈자일등(貧者一燈)의
겸허한 보시의 자세로 눈빛과 마음을 열어
보이는 일은, 비록 작지만 어울림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실천하는 대승적 자아를 찾아가는
값진 삶의 여정이 아닐까 싶다.
*
사령운, 왕유, 이두 113인 2783수 /
반절,
사상, 신문체의 출현등에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