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수와 절복
김호귀
/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선종에서
선을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서 선은 여러
가지로 불리운다. 가령 수행방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을 들
수가 있고, 종파를 기준으로 한다면 달마선
임제선 조동선 위앙선 운문선 법안선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여래선 조사선
등을 들 수가 있고, 기타 그 깊이나 역사에
따라서는 외도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등을 들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선의 분류방식은
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대단히 편리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조사선과
여래선을 분류하는 방법은 선을 가르치는
방식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선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
조사선의 경우 조사라는 것은 큰스님 내지
훌륭한 가르침을 베풀어주는 사람을 가리키고,
여래선의 경우 여래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경우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이와 같이 분류한 것은 일종의
교수법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스승이 제자에게 사과에 대하여 이해를
시키는 경우 사과는 맛으로는 새콤하고
달콤하며 모양으로는 둥글고 주먹크기만
하며 색상으로는 빨간색과 푸른 것 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 설명을 통해서
제자가 사과에 대하여 맛과 모양과 크기와
색깔 등을 이해하는 경우는 소위 여래선
내지 의리선에 해당된다. 이와는 달리
사과를 제자에게 내밀고서 직접 먹어보면
사고가 어떤 것인지를 알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소위 조사선 내지 격외선에 해당된다.
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이 좋고
훌륭하며 어느 것이 나쁘고 수준낮다든가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사과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했을 경우 제자가
얼마나 거기에 접근했는냐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제자와 내지 보통의 사람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인식 내지 깨침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과 비유와 인연담 등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노파심으로 친절하게 일깨워주고
이끌어주는 방법을 취하였다.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평생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선을 이해시키고 체험케 하는 이와 같은
가르침의 방법을 여래의 가르침에 비유하여
여래선이라 하는가 하면 선의 도리에 대하여
갖가지 설명과 비유를 들기 때문에 의리선이라
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선을 공부하는
제자가 제아무리 좋은 호흡법과 좌선법을
익히고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그 필요성을 느끼고 노력하여
맛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바로 이와 같은 제자에게 어떤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 체험하게끔 만들어주는
선의 행위방식을 조사선 내지 격외선이라
하였다. 이것은 주로 역대의 조사들이
제자에게 사용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하는가 하면 일상의 틀에 박혀 있는 형식과
매너리즘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에서
격외선이라 하기도 한다.
가령
임제의현의 경우 스승이었던 황벽희운에게
'불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으나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기는커녕 도리어 세 차례나 얻어맞고
내쫓기고 말았다. 이것은 황벽스님이 임제로
하여금 스스로 깨침에 대한 다부진 결심과
노력을 기울이게끔 만든 방법이었다. 이를
통하여 임제는 스스로 깨침을 얻고 스승의
크나큰 가르침에 깊이 감복하였다. 가령
병자에게 제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병자가
그것을 스스로 복용하지 않으면 효용이
없다. 그 병자 당사자가 스스로 약을 먹고
병을 치유해야겠다는 결심과 노력이 없이는
병을 물리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미주알고주알 자상한 설명을 통하여
목표에 이끌어들이는 여래선 내지 의리선의
경우와 일종의 냉정하고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자를 몰아붙이는 조사선 내지
격외선의 경우 그 방식은 서로 다를지라도
조사선이나 여래선의 경우 모두 공통적인
점이 있다. 그것은 스승이 제자로 하여금
어떤 목표점에 도달하게끔 하려는 대자비심의
발로라는 것이다. 아만이 높은 사람에게는
그 아만을 꺽어주기 위하여 심지어 물리적인
방법까지도 필요하겠지만 능력이 부치고
의기소침한 사람에게는 어린아이를 달래주듯이
사탕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부처님은
그 제자나 보통의 사람을 대할 경우 반드시
섭수(攝受)와 절복(折伏)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달래주고
보살펴주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이 위로하고 보듬어주며
자세하게 가르쳐서 이끌어들였는데 이것이
곧 섭수의 방법이었다. 반면에 정법을
파괴하고 인륜을 저버린 사람에게는 힘을
통하여 그것을 제어하고 물리쳐 마침내
올바른 도리를 행하게끔 만들었는데 이것이
곧 절복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당근과
채찍처럼 인과응보라는 도리를 설하는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때로는 극락세계를
설정하여 자비의 온화한 모습으로 부처님
스스로가 앞장서서 착한 곳으로 인도하려는
당근을 주기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지옥세계를
설정하여 악마와 염라대왕의 무서운 모습으로
등장하여 뒤에서 몰아치면서 악한 곳에
빠지지 않도록 채찍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대자비심은 마냥 부드러운
모습으로만 등장한 것은 아니다. 힘과
위엄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비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보살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섭수와 절복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자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줄을 알고 받아들이는
자야말로 진정한 불자의 모습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