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唯識)
최인숙
/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란
우리 앞에 펼쳐지는 대상들의 모음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이러한 대상들을 정밀한
도구와 수학적 방법에 의해 그 근본에
이르기까지 밝혀낼 것을 목표로 한다.
근세 이후 자연과학자들은 극미의 세계에서
극대의 세계에 이르는 이 세계를 철저히
파헤쳐 알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승승장구 발달에 발달을 거듭해왔다. 그러한
발달은 소립자물리학과 천체물리학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근대의
자연과학은 이 세계의 극미의 요소를 알아내면
극대의 세계인 우주 전체의 체계까지 알
수 있다는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전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궁극적인 부분의 요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궁극 요소의
이름이 바로 소립자이며, 이 개념은 원자라는
개념에서 비롯한다. 원자(a-tom)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궁극의 불변의 영원한
물질적 존재를 뜻하는데, 이 개념은 원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에 속하는 데모크리토스가
만들어냈다. 데모크리토스는 이 세계는
오로지 원자들과 원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원자론에 바탕을 둔 근대의 자연과학
또한 철저한 유물론에 속한다. 자연과학
일반의 견지에서 볼 때,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물질적 존재뿐이다.
우리들의
삶은 무릇 '있는' 것에 따라 움직인다.
물질적 대상들이 내 눈 앞에 '있고', 돈이
'있고', 토지가 '있고', 집이 '있고',
지위가 '있고', 남 여가 '있고', 교수
학생이 '있고', 부모 자식이 '있다고'
생각하여, 우리들은 그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지 못할 때, 혹은 얻었다가
잃게될 때, 우리들은 상심하고 좌절하며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기까지 한다.
우리들은
왜 공부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들은
부모에게서 무수히 들었으며, 현재의 부모들
또한 자식들에게 강조하는 말, "다
너희들 잘 되라고 그러는 것이다. 다 너희들
잘 살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잘 되는 것', '잘 사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실 어른들의 그 말은 바로
'재물 지위 획득 내지 여자 남자를 잘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공부 잘
하라는 말은 결국 '물질적으로 잘 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자신의
'바깥의' 사물, 재물, 토지, 집, 지위,
여자, 남자, 자식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삶의 진면목을 직시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참으로 있는 '실재'가 아니라, 부유(浮遊)하는
뜬구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순간들이
가물에 콩나듯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
뜬구름들은 기상의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이런저런 형태를 취하며, 이곳저곳으로
밀려가기도 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붓다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우리
마음의 작용의 결과이다. 나의 마음 '바깥의'
대상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본질(자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고, 나의 마음과의 관계에서
상으로 나타나는 표상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표상들을 인식하는 마음도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이 마음 역시 다양한 대상들을
대상으로 지각함으로써 비로소 의식되는
것으로서, 어떠한 지각작용 없이도 그
자체의 본질(자성)을 지닌 절대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한편으로 매우 이해하기
힘들고,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들이
일생동안 얻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들이
모두 마음의 조화의 결과이며(法空), 이
마음 또한 본질이 없는 것이라는 말은(我空)
일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
법공
및 아공의 사상은 자칫 공허한 말의 유희에
불과한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허무주의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 이에
유식사상(唯識思想)이 나타난다.
유식사상은
4 5세기경 무착(無着, 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 형제에 의해 체계화되며,
그 이후 인도를 거쳐 중국, 한국 등에
전파된다.
세친은
원래 설일체유부(소승)에 속해 있었으나,
후에 형인 무착의 충고에 따라 대승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시킨
학승이다. 세친은 유식이십론, 유식삼십송,
성유식론 등에서 불교의 공사상을 의식의
변화과정을 통해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식삼십송에
의해 세친은 유식사상의 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기게 된다.
유식(唯識)은
말 그대로 오로지 식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다 가유(假有)로서, 그것들은 우리
마음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상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의식의 흐름의 과정뿐이고,
그 의식의 흐름 바깥의 대상이 독립적으로,
실재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唯識無境).
유식무경
사상에 의해 외계실재론(外界實在論)이
적극적으로 논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대상의 상들(표상들)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 표상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의식 속에 부단히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나타나는 표상들을 세친은
유식삼십송에서 식전변(識轉變) 이론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식전변
이론은 우리들의 일상의 의식의 변화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매우 치밀하게 논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세친의 식전변 이론은
현대의 어떠한 심리학 이론보다도 정치함을
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식전변 이론은
단지 심리이론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의 의식을 철저히 추적함으로써 자신의
의식, 마음을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천철학을
지향하고 있다. 식의 변화, 식전변 이론을
담고 있는 유식삼십송은 현대적인 심리학
및 실천철학에 손색이 없다. 아니,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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