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도량

겨울 밤 산사에서 한 잔 술을 마시며
강석근 /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

華堂?室宴連宵 화려한 집 따뜻한 방에서 밤마다 잔치하니

富貴中間味易銷 부자들과 귀인들 사이라 술맛이 나지 않네

何似山齋深夜雪 어찌 흰 눈 내리는 깊고 깊은 산사에서

閑燒칝쭕暖寒꽁 한가히 모닥불 피워 막걸리 데우는 멋에 비기랴

<동국이상국집 후집 1권, 冬夜山寺小酌>

이 시는 백운거사 이규보의 <겨울밤 산사에서 한 잔 술을 마시며>라는 작품으로 그의 풍류적 성격과 불교적 관심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 가야금 술[詩琴酒]을 너무 좋아하여 자기 스스로를 삼혹호(三惑好) 선생이라 불렀을 만큼 시와 술과 음악에서 떨어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시는 그의 이런 예술적 취향에 깊은 밤과 눈 내리는 산사의 정경이 갖는 아름다움까지 덧보태서 낭만적인 그의 기질을 마음껏 보여준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눈 내리는 밤 산사에서 모닥불을 데워 마시는 찬 막걸리'가 고관의 저택이나 화려한 술집에서 마시는 귀한 술 보다 더욱 운치있다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산사가 매우 개방적인 공간이었지만 금주의 공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가 산사의 모닥불에 데워 마시는 한 잔 막걸리 맛이 최고라 한 것은 대단히 파격적 발원이다.

그러나 이 시의 독자들은 그가 금주의 계율을 어기고, 성스러운 공간을 더럽혔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절에서 성속(聖俗)의 분별조차 넘어선 그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읽어낸다. 이는 일종의 선적(禪的)인 파격이고 역설이다. 금지된 장소에서 마시는 음주가 오히려 그의 자재한 정신과 고차적인 도력을 나타내 주는 매개가 되고 있다. 이 같은 파격이 갖는 신선함으로 인해 독자들은 그의 시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이규보는 《고려재조대장경》이 출판되던 불교문화의 절정기를 살았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난만하게 피어나는 문화적 풍토에서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마음껏 펼쳤던 그의 불교시에는 재철 과일의 농익은 맛과 문학적 향기가 넘실거린다. 우리나라에서 선시를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스님이 진각국사 혜심(慧諶)이라면, 선시와 불교시에 문학적인 맛과 멋을 한껏 부여한 인물은 이규보였다. 다시 말해 중국의 왕유(王維)에 비견해서 우리나라의 시불(詩佛)이라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규보라 하겠다. 지금까지 <시심불심>에서 살펴본 그의 불교시들은 이 점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