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또 다른 너, 붓다
이현우 / 인도철학과 3년

B에게. 너로 인해 내가 2000년 4월의 어느 날, 벚꽃이 흩날리던 여의도 거리에 박제가 되어 버린 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생물학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을 터인데, 가끔씩 나는 지금의 나와 당시의 나를 혼동하고 있는가 보다. 그리고 또한 여전히 그 때의 네가 지금의 너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를 만나기 전, 내가 원하던 것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 단 하나였다. 나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위한 최초의 시도는, ‘나의 육체는 나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비록 열일곱 살 이후로 한 치도 자라지 않았건만 그것을 나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의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 소멸되어 7년이 지나면 온몸에 남아 있는 모든 세포는 7년 전의 세포들과 전혀 다른 세포들로 채워지게 된다 하니 말이다. 물리적인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나라는 동일성을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신을 만들고, 여호와를 만들고, 브라만과 아트만을 만들고, 절대 정신을 만들고, 차라투스트라와 초인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어느 것 하나도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나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벽’이란, 무릇 세상의 끝이 아니라 한 세상과 다른 세상의 경계가 아니던가? 이를 넘는 것은 나를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에 눈뜨게 하리라. 내가 아는 한, 이렇게 눈뜨게 되는 것을 ‘붓다’(부처)라고 일컫는 듯하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닌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로 한다. 내가 아닌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비로소 온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남으리라. 그리고 나는 보았다. 결국 진정으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가 없는데, 감히 무엇이 존재한다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너를 만났다. 내가 너를 만나는 동안에도 나는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국 나는 너를 만나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너를 통해서 나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너로 인해, 존재의 증명은 결국 아주 간단하고도 명쾌하게 해결되었다. 단순한 물리적 실체들을 제외하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수많은 관계의 정의 그 자체가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있었고, 너와 길을 걷고 있는 내가 있었으며, 너를 기쁘게 해 주는 내가 있었고, 너를 마음 아프게 했던 내가 있었다. 너와 내가 관계하는 것은 비록 내가 희구하고 또 나를 절망하게 했던 불변하는 실체 없이도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이었을까? 내가 너에게 너무나 취해 있었기 때문인가?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네가 나를 떠나 버렸고, 나는 또 다시 나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네가 나를 떠난 후에도 나는 분명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건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는 여전히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이 나를 증명해 주지 않았겠냐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나를 증명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그 관계들이 진실임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물론 나는 너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나는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그 존재의 고통에 대한 문제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네가 더 이상 나와 어떠한 관계도 없는데 왜 나는 여전히 고통 받아야 하는가? 그 질문은 틀림없이 우문(愚問)이다. 그리움이라는 관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백하게 나의 그리움, 그 집착이라는 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있음을 보았다. 결국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 역시 잘 알다시피, 그것을 포기하거나 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맹신에서 비롯된 추악한 욕망과 더러운 집착일 뿐이라 해도 생을 이끄는 원초적인 힘이란 건 부정할 수 없지 않더냐.

나는 이제 너와 나의 관계를 잇고 있는 그리움과 집착이라는 마지막 끈을 끊을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모든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무언가를 안다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또한 그것은 이제 나의 문제가 의지와 실천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직 나는 나로 하여금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는 이 문제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너는 이런 나를 보고 여전히 박약한 의지의 인간이라고 비웃을 테고 아마도 너의 그 말이 틀림없는 사실일 테지만, 나는 내가 본 것을 보다 치열하게 의심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이제 너는 없다. 내가 너 없이 존재하지 못했던 것처럼 너 역시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비록 지금은 너의 존재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지만 나는 결국 언젠가 너의 존재까지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이 모든 고통을 끝내리라.

그것은 최초의 너의 가르침이었지만 결국 나의 깨달음이고 이제는 나의 실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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