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도량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
김미숙 / 불교대학 강사

2003년 10월 16일 늦은 밤이었다. 우연히 돌려 본 텔레비전 채널의 화면에서는 눈물 그렁그렁 고인 한 여인이 애잔한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짧은 인생이랍니다. … 남들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화면은 길바닥에 하얀 비둘기를 그리고 있는 사람들의 등줄기였다. 그 순간, 내가 스리랑카에 들렀던 당시에도 검문이 심했던 북부의 정황이 스치면서 그 때 다녀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여인의 눈물 끝에 떠올린 황망한 심사에 스스로도 놀라면서, 하루빨리 스리랑카의 내전이 종식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마음 속 깊이 다시 가고픈 마음 간절하기 때문이다.

타밀족과 싱할라족 사이의 분란으로 폭탄 테러가 끊이질 않는 스리랑카의 현실. 10여 명 정도가 죽은 테러 소식에는 놀라지도 않는다는 사람들. 그들이 말한다. 한 50명쯤 죽었다고 해야, “좀 많이 죽었네.” 한다고.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스리랑카는 그런 핏빛 테러와는 무관한 그야말로 불보(佛寶)의 땅이었다. 스리랑카 섬 자체가 에메랄드 빛 보석과도 같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터이고, 그 중에서도 촉촉이 비에 젖어 있던 아누라다푸라를 난 잊을 수 없다.

스리랑카 최고(最古)의 유적들이 모여 있는 아누라다푸라는 수도 콜롬보에서 205킬로미터 떨어진 북동쪽에 있다. 싱할라족의 비자야 왕자의 신하였던 아누라다가 처음에 터를 잡았고, 기원전 380년경에 판두카바야 왕이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대사』(大史)에 따르면, 사냥꾼이나 이교도, 국외인 등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특별히 기획하여 만든 도시가 아누라다푸라였다고 전한다. 그 후로부터 아누라다푸라는 시기리야와 폴론나루와 등으로 잠시 이전했던 시기를 제외하고 약 1,200년 동안 정치적, 종교적 수도로서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남인도에서 번성했던 왕조의 세력 확장으로 인한 침입의 결과, 비자야바후 1세 때인 1070년에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완전히 이전하였고, 그 후로 아누라다푸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전성기의 모습을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누라다푸라의 지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소한 3,000 내지 4,000채의 건물들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

아누라다푸라의 유적지를 돌다가 보면, 유독 줄지어 선 돌기둥들이 눈에 많이 띠는데 그것은 스리랑카 특유의 건축 양식 탓이기도 하다. 비가 많은 열대 기후 속에서 습기를 피하고자 기둥을 높이 세우고 건물을 올렸는데, 세월 탓으로 지금은 돌기둥들만 즐비하게 남아 있다. 궁전 터가 그렇고 수많은 승원 터가 그러하다. 하지만 그러한 유적들보다도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전 세계 불교도의 선망이자 나무 자체로도 최상의 숭배를 받고 있는 보리수 한 그루이다.

일찍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던 자리에 그늘을 드리웠던 바로 그 보리수에서 가지를 쳐서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고 믿어지는 스리 마하보디 나무. 이 나무는 그 자체로도 수령이 가장 오래된 보리수로 인정받은 나무이다. 수령이 무려 2,200년! 기원전 3세기경에 아쇼카 왕의 딸이었던 상가밋타 비구니가 스리랑카에 이식해 온 것이라 한다. 성스러운 보리수 신앙으로 결실 맺은 나무 한 그루는 스리랑카 불심의 역사를 입증해 주는 대표적인 증표이기도 하다.

지금은 나무에 쉽게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울타리를 세워 보호하고 있지만 무성한 잎사귀에 못지 않게 수많은 깃발들이 형형색색으로 걸려 있다. 그 앞에는 흰 빛 정갈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 줄지어 앉아서 염송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나무 앞에는 말 그대로 하루 24시간, 365일 동안 기도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며, 염불 소리가 2,0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외지인들은 나무 자체보다는 그 신앙의 힘에 전율하고 만다.

보리수 참례를 마치고 곳곳에 솟아 있는 다가바로 향하면, 물빛 공기 속에서 은색으로 빛을 발하며 압도해 오는 다가바! 누구에게나 아누라다푸라는 다가바의 인상으로 기억되기 마련일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보리수 인근에 서 있는 루완웰리 세야 다가바를 비롯한 여러 탑들 때문이다. 다가바(dagaba)란, 스투파에 해당하는 싱할라 어인데, 스리랑카의 불탑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루완웰리 세야 다가바는 총 높이 55미터에 달하는데, 원뿔대 모양의 전체가 눈 빛으로 칠해져 있다. 하도 눈부시기에, 바로 쳐다보다간 눈이 상할 정도라고도 말할 만큼 찬연하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경에 처음 축조되었던 탑의 높이는 110미터에 달했으며, 현재의 모습은 옛 모습을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보리수 염주를 손에 쥔 순례객들은 그 탑을 오른쪽으로 하여 돌고 또 돈다. 그 다가바의 기단부 주변에는 여러 마리의 코끼리가 새겨져 있는데 그 까닭은 커다란 다가바를 코끼리들이 옮겨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크기보다는 연륜으로 더 유명한 투파라마 다가바도 있다. 본래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다가바로서 기원전 4세기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부처님의 오른쪽 쇄골 사리를 봉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쉽게도 19미터 높이의 현재 다가바는 1984년에 재건한 것이다.

그 밖에도 3,000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제타바나 승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122미터의 다가바가 있고, 5,000명이 머물렀다는 아바야기리야 승원의 다가바는 113미터에 달한다.

사실, 아누라다푸라로 가는 길은 잠시 들르기만 하는 관광객에게도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스리랑카 불교 유적지들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콜롬보에서 멀어질수록 심해지는 검문의 강도가 아누라다푸라에 이르면 절정에 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나면 스리랑카 불적의 정수를 놓치고 말 것이다. 스리랑카의 불교 유적지는 폐허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가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듯이, 전 세계 불교도의 순례 성지로서 그야말로 활발발(活톻톻)하다. 물론 그 중 으뜸은 아누라다푸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