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살아라
홍사성 / 불교평론 편집위원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모음집인 <본생경(本生經)>에는 수행자가 진리의 말씀 한마디를 얻어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구법(求法)의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어떤 구도자가 있었다. 그는 오로지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에 전념했다. 어느 날 그는 미묘한 가락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나니 이를 가리켜 나고 죽는 이치라 하네.(諸行無常 是生滅法)”

그는 이 노랫말이 무척 훌륭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했다. 그는 간절하게 뒷구절을 기다렸다. 그 때 어디선가 험상궂은 나찰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뒷구절이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리라. 그러나 나는 지금 굶주려 있다. 노래를 부를 힘이 없다. 나는 살아있는 고기와 피가 필요하다.”

수행자는 나찰에게 뒷구절만 들려준다면 자기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나찰은 수행자를 위해 뒷구절을 노래했다.

“나고 죽는 것 그것마저 없어져버리면 이를 가리켜 고요한 즐거움이라 하네.(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노래를 들은 수행자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진리를 깨달은 기쁨에 몸을 떨며 망설임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 수행자는 다름 아닌 과거세의 부처님이었다.

‘설산동자의 구법’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두 개의 테마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나찰이 읊었다는 사구게(四句偈)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설산동자의 간절한 구도심에 관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는 것, 나고 죽는 것마저 없애버리면 참다운 즐거움을 이루리라’는 시는 짤막하면서도 불교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실로 이 두 마디의 내용을 성취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불교의 최종목표인 ‘적멸위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앞의 얘기는 매우 전율할만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산동자가 벼랑에서 몸을 던진 것은 간절한 구도의 마음 때문이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간절함, 그것 때문에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목숨을 거는 일은 비단 ‘구도의 길’에서 뿐만 아니다.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고자 한다면 그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걸만큼의 간절한 마음을 갖는다면 이루어내지 못할 일이 없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다. 지성이란 글자 그대로 정성을 다했다는 뜻이다. 인생에서 정성을 다한 일이 실패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성은 바로 간절함이고, 간절함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렇다. 지성을 다하고 목숨을 걸만큼의 간절한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설사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아름다운 사랑의 완성이다. 소설 <노틀담의 꼽추>에서 꼽추 콰지모도는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다가 한줌의 재가 된다. 그 사랑은 지성을 다하고 목숨을 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완성되었다.

우리는 가끔 지성을 다했는데도 어떤 일이 실패로 끝났다고 불평하는 사람을 본다. 좌절과 절망을 이기지 못해 끝내 자살이라는 비극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실패한 사람들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과연 당신은 그 일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가. 혹시 목숨을 건 것처럼 흉내낸 것은 아닌가....’

너무 비정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왜 남의 실패를 위로해주지 못하느냐고 눈흘김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마음써야 할 것은 목적한 일이 안 된다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설산동자처럼 그 일의 성취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느냐에 있다.

우리의 일상을 돌이켜 살펴보면 세월을 낭비하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생이란 그렇게 낭비해도 좋을 만큼 넉넉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눈 한 번 깜짝하고 숨 한 번 내쉬는 그 순간 인생은 끝나버린다. 목표를 가진 사람에게 하룻밤의 허송은 자칫하면 그 목표 자체를 상실하게 할 수도 있다.

<장로게경>이란 경전을 보면 허송세월을 경계하는 다음과 같은 잠언이 있다. 

“하루의 광음이 짧다고 그것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하루를 버리는 것은 하루동안 그대의 생명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인생은 아무 까닭 없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인생에는 목적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가기 위해 태어났다. 그래서 불교는 인생을 열심히 살라고 가르친다. 하루라도 방일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살 것, 간절한 마음으로 살 것을 강조한다. ‘생명(生命)’이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누구보다도 부처님 자신이 그렇게 살았고, 생사의 강물을 건너간 모든 수행자가 그렇게 살았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왜 간절하고 지극한 자세로 살지 못했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지극하고 간절하게 매순간을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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