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샨 왕조의 불심 어린 바미얀 계곡
신혁진 / 만불신문 기자

바미얀. 실크로드 어딘가에 있는 계곡의 이름이자 거대 석불이 있었던 석굴군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미얀 대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을 뿐 포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내전 와중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인 탈레반은 우상을 철거한다며 2001년 3월 바미얀 대불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간다라 불교 미술이 낳은 불후의 걸작으로 세계 최고 높이(53m)를 자랑하던 바미얀 석불 1km 남짓 떨어진 곳의 37m 높이의 석불도 모두 파괴되고 만 것이다.

유네스코(UNESCO. 유엔 교육 과학 문화 기구)는 지난 7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계곡을 '세계 문화 유산'과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 유산'에 동시에 등재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옛 탈레반 정권에 의해 파괴된 고대불상들이 있는 바미얀 계곡을 포함시킨 것은 "고의적인 불상 파괴와 같은 나쁜 행위들이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제 사회의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물이 산재한 이 지역의 파괴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국제 사회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탈리반의 석굴군 파괴는 단순히 이교도의 우상물 파괴가 아니라 수십년을 끌어온 지역 분쟁의 결과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힌두쿠시 산맥과 바미얀 계곡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인데다가 700여 개의 석굴은 대부분 점령군의 탄약고, 무기고, 식량 창고 등으로 활용되어 온 것이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미얀은 힌두쿠시 산맥의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호자와 가르 산맥과 바바 산맥 사이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미얀 강이 흐르고 그 계곡을 따라 석굴군이 형성돼 있다. 1.7km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700여 개의 석굴이 자리하고 있다. 바미얀 지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쿠샨 왕조에 들어서의 일이다. 쿠샨 왕조는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민족이다. 쿠샨 왕조의 최강의 군주였던 카니슈카 왕은 인도 대륙 서북부를 점령하면서 불교를 독실히 신봉했다. 바미얀을 비롯한 아프간 지역 불교 유적은 대부분 그 당시 조성된 것이다.

바미얀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의 기록이다.

현장 법사는 서기 602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서 태어난 당나라 최고의 고승으로 불교 연구를 위해 627년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도중 고창국(高昌國) 왕 국문태(麴文泰)의 대접을 받았고, 인도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戒賢, 시라바드라)과 함께 불교 연구에 힘썼다. 당시 카나우지의 하르샤 대왕도 스님을 극진히 모셨으며,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 법사는 당 태종(太宗)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했고 총 12권의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를 저술해 당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상황을 후세에 알렸다.

현장 법사는 그 여정에서 만난 바미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범연나국(梵衍那國=바미얀)은 동서가 2천여리, 남북이 3백여리로 설산 한가운데 있다. 사람들은 산이나 골짜기에 드물게 살고 있다. 목축에는 적합하여 양과 말이 많다. 기후는 춥고 쌀쌀하며 풍속은 야만스럽고 가죽이나 굵은 베를 입은 사람이 많은 것도 풍토에 맞는 것이다.

문자나 교육이나 화폐의 용법은 토화라(吐火羅=파키스탄)국과 같다. 언어는 조금 다르지만 몸짓이나 용모는 대략 같다. 신앙심이 독실한 것은 근처 이웃 나라들보다도 현저하다. 위로는 불교의 삼보로부터 아래로는 이교의 백신(百神)에 이르기까지 성심성의를 다한다.

가람은 수십 개소나 있고, 승려가 수천 명 있으며, 소승(小乘)의 설출세부(說出世部)를 학습하고 있다. 왕성 동북쪽의 산 깊숙한 곳에 석상이 있다, 높이 1백40 50척으로 금빛으로 빛나며, 보석 장식이 휘황하다. 동쪽에 가람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이 세웠던 것이다. 가람의 동쪽에는 주석의 석가불 입상이 있다. 높이 1백여 척이다. 신체의 부분을 몇 개로 나누어 따로따로 주조한 후 그것을 합쳐 만들었다. 성의 동쪽 2 3리 되는 곳의 가람 안에는 부처의 열반 와상이 있고, 길이가 1천여 척이나 된다."

현장 법사의 바미얀 석굴군에 대한 묘사는 매우 세밀한 것으로 '높이 1백 40 50여 척의 입불'이라고 한 것은 서대불이 틀림없고, 금빛으로 빛났다는 것으로 보아 금박을 입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놋쇠)로 만들었다고 묘사한 동대불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장 법사의 이같은 묘사는 최근 바미얀 석굴군 현장 조사를 벌인 유네스코 연구진에 의해서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바미얀 지역을 조사하던 유네스코 소속 일본인 고고학자들은 최근 현장 법사가 쓴 것으로 보이는 불경의 일부를 발견했다. 이들은 지난 7월 중순부터 지난달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과 함께 바미얀 석굴군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연구진이 발견한 불경 조각은 가로 5cm, 세로 2cm의 작은 불경 조각 5개로, 나무조각에 먹으로 쓰여져 있으며 상당 부분 부패해 있었지만 현장 법사가 활약했던 7세기경에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된 것으로 판명됐다.

이번 발굴로 인해 대당서역기와 현장 스님, 서역과 동아시아의 불교 교류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의 계기가 될 것으로 학계는 기대하고 있다.

2002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지만 이곳에서의 총성은 그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미 파괴된 유적을 되살릴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옛날 쿠샨 왕조의 불심의 총아였던 아프간 바미얀 계곡이 분쟁 지역, 종교 갈등 지역의 상징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비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여기서 사용한 그림은 Volker The walt 박사가 1974년 8월에 찍은 사진들로 http://www.thewalt.de/afgha

nistan/haibak_bamiyan/index.htm에 공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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