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불이(信心不二) 김호귀 / 불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가을의 초입에서 요즈음은
며칠 동안 서울의 새벽 하늘이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다. 도심의 허공에 총총
빛나는 별과 그믐날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인지 점점 사그라드는 눈썹달은 또 명징하기
그지없다. 지난 여름날 밤에 소백산 천문대에서
관찰하던 하늘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놓은
듯하다. 이와 같은 모습이 새삼스럽게
처음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인데도 말이다. 하늘의
별과 달은 언제나 낮이고 밤에도 그렇게
있었을 것이고, 시골이나 서울에도 늘상
있었을 터이다. 자신이 세상에 오기 이전부터
그랬을 것이고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소에는 항상
잊고 지내기 십상이다.
밝은
대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맑은 밤에
드러나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맑은 날 밤이라해도 별과 달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 시간에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달과 별이라고 인식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그것을
바라볼 줄 아는 자신이 없다면 드러나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자신이 깨친 진리에 대하여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대하여
"눈 있는 자는 보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말했다. 붓다는 자신이
터득한 진리가 항상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어떤 모습으로든지 드러나 있고 열려 있으며
깨어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내보인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활용하고 전개시켜 나아가는 것은
각자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 설령
자신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그 진리가 사라진다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대로 존재하고
작용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자사가 부질없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차별적으로 분별할
뿐이다. 부질없는 그 분별심이야말로 중생심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차별적인 분별심을 떠난
청정한 평등심으로 나아가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 세상 우리네 삶에서 분별이 없어서는
안된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
등을 분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리이다.
그 분별이란 곧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일체행위에 대한 자신의 판단 기준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네 삶이 그렇게 이루어져 나아감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차별적인 분별심을
지녀서는 안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승보살은 분별심을
내서도 안되고 집착해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대승보살의 삶은 우리네
삶과는 십만팔천리나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집착이
따르는 분별심을 경계한 것이다. 집착을
초월한 분별심이란 자비심이고 평등심이다.
바로
불자가 대승보살의 정신을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그것이 차별적인
분별심이 아닌 청정한 평등심이다. 곧
대자비심이다. 이에 대하여 금강경에서는
초발심보살이 어떻게 하면 청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며, 차별적인 번뇌심을 없앨 수
있는가를 설정하여 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집착은 탐욕을 부르고 남과 자신에게
못마땅해하여 스스로 화를 내며 한쪽으로
치우쳐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자신만이 최고라는
아만을 갖게 하며 온갖 것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붓다는
청정한 평등심을 유지해야만 그와 같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청정한
평등심이란 달리 말하면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각자의 본래면목으로서 본래심이다.
청정한 평등심을 지니기 위해서는 각자가
본래부터 청정심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디서
돈을 주고 빌려오거나 사오는 것이 아니다.
누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가 그런 존재인
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이란 청정한
본래심에 대하여 바로 '아하 그렇구나'
하고 깊이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믿음은 깨침의 근본이고 온갖 공덕을
가져다 준다."(信爲道元功德母)라고
말하였다. 이 믿음은 그대로 깨침으로
통한다. 믿는대로 알고 아는대로 터득하며
터득하는 대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것을
믿는 마음과 믿는 행위는 다른 것이 아니다.
믿음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믿음이다.
이것을 신심불이(信心不二)라 하였다.
믿는 대상과 믿는 자신이 일치하는 경험이다.
새벽
하늘에 빛나고 있는 달과 별은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다. 자신이 믿건 믿지 않건간에
상관없이 그대로 있었고, 자신이 바라보건
바라보지 않건간에 관계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과 별을 믿고 바라보며 자각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달과 별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달이고
자신의 별이 된다. 달과 별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하늘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달이 되고 별이 된다. 다만
그것을 믿고 자각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여전히 달과 별은 그저 달과 별로 하늘에
떠 있다. 그런데 맑은 달과 별빛에 쬐여서
그런지 새벽 공기가 참 시원하고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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