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영(宗聆) 스님을 방문하여
강석근 /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足庵高寄碧巖根     족암은 푸른 바위 주변에 높이 솟아있고

銀葉燒香夜閉門     스님은 은향로에 향 사르고 밤이 되면 문을 닫네

不用蓮花空作漏     연꽃도 필요 없는데 공연히 물시계를 만들랴

飢飡困臥是朝昏     주리면 밥 먹고 곤하면 누워 하루를 보내네

<동국이상국집 전집 2권, 訪聆首座夜臥方丈次聆公韻>

 

위의 시는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작품으로 <종영(宗聆) 수좌의 족암(足庵)을 방문하여 밤에 방장에 누워 스님의 운에 차운하다>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다. 종영 스님은 고려 때의 문인인 이인로(李仁老)다. 그는 유명한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 의 저자로서 무신의 난을 피해 입산해서 승려가 되었다가 다시 환속한 인물이고, 종영은 승려 시절에 그가 사용하던 법명이다. 이인로와 이규보는 당대를 대표하던 문인으로서 우열을 다투던 맞수였고 아울러 친불교적인 행보를 보여왔던 불자였다. 이 한 편의 시에는 두 사람의 우정과 신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 서술된 족암은 속세의 티끌을 떨쳐버린 한적한 공간인 동시에 스님의 탈속한 정신적 경지를 상징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스님의 일상은 은향로에 향 사르고 해지면 문 닫는 일처럼 간소하고 자연스럽다. 게다가 향을 피우고 문을 닫는 행위에도 작위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예불하려고 향 피우고 해가 졌으므로 닫을 뿐이다. 이처럼 유유자적하고 탈속적인 삶을 사는 종영 스님이 연꽃으로 상징되는 불교적 진리에 대한 집착까지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세인들이 시간을 재는 물시계를 왜 만들겠는가.

이규보는 "다만 평시에 일이 없으니/ 똥 싸고 오줌 누며/ 추우면 옷 입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음 오면 잔다"라는 선가의 고사를 빌러와 종영 스님의 탈속적이며 고차적인 정신 세계를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재창조하고 있다. 이 시는 이규보가 이인로를 고승으로 인정하고 승복하는 마음을 담아 전하는 작품으로 두 사람이 고결한 도우(道友) 관계임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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