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동거하는 법
홍사성 / 불교대학원 강사

부처님이 라자가하 교외 칼란다 대나무 숲에 계실 때의 일이다. 존자 박카리가 마을의 옹기장이 집에서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다. 그는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음을 느끼고 간병하던 존자 푸루나에게 부탁하여 죽기 전에 부처님을 한번 뵙게 해달라고 했다. 푸루나는 박카리의 부탁을 받고 부처님을 찾아가 사정을 여쭈었다. 부처님은 푸루나를 따라 도공의 집으로 박카리를 찾아갔다. 병든 박카리는 부처님의 내방(來訪)을 받고 일어나 예배하려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박카리를 다시 병상에 눕히고 머리맡에 앉았다.

"어떠냐, 견딜 만하냐, 얼마나 아프냐?"

"부처님 저는 회복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뵙고 발 밑에 예배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몸으로는 도저히 부처님 처소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박카리야, 나의 이 늙은 몸을 보고 예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대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진리(法)를 보는 자가 부처님을 본다. 부처님을 보는 자가 진리를 본다' 라고."

이어서 부처님은 박카리에게 오온(五蘊)의 무상함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에 욕심내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윤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소원대로 부처님을 친견한 박카리는 다음날 아주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잡아함 47권 1265경<발가리경(跋迦梨經)>에 나오는 얘기다.

이 경전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부처님과 제자 사이의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제자가 죽음에 임박해 스승을 보고싶어하자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부처님의 모습은 어버이와 같은 자상한 면모가 느껴진다. 또 한가지는 부처님이 자신에게 예배하려는 병든 제자를 만류하며 '진리는 보는 자가 부처님을 보는 자'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대화는 부처님과 제자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짐작케 해준다. 초기교단에서 부처님은 권위적 스승이기보다는 참다운 진리를 향한 도반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에게 예배하기보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 같은 입장은 대승경전인 <금강경(金剛經)>에도 나타난다.

 

若而色見我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고자 하거나

以音聲求我 소리로써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是人行邪道 그는 사도를 실천하는 것이므로  

不能見如來 끝내는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다시 말해 부처님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절에 모셔진 등상불에 예배하거나, 덕 높은 고승의 설법을 백 번 듣는다해도 참다운 부처를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부처님은 탐욕과 증오와 망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분이다. 진정으로 그분의 설법을 들었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자가변화를 위해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기울이는 것이 도리다. 그런데 겉으로는 불교를 믿는 척하면서 뱃속에 똥만 가득한 사람이 어떻게 부처님을 만나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는 바로 이런 중생의 머리에 내리꽂히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일상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진리를 볼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과연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일까.

며칠 전 택시를 탔을 때의 일이다. 운전기사는 택시 속에 호신불(護身佛)이 들어 있는 염주를 걸고 다니는 불자였다. 나는 그가 왜 염주를 걸고 다니는지에 대해 물었다.

"염주를 걸고 다니면 정말로 교통사고를 내지 않는가요?"

"그렇고 말고요. 부처님을 생각하면 너그러워지고 정직해지거든요."

그러면서 그는 얼마전 자기가 경험한 얘기 한가지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그는 손님 한 분을 태웠는데 그 손님은 무엇이 급했든지 작은 손가방을 하나 놓고 내렸다. 열어보니 그 속에는 3백만 원이라는 거액이 들어 있었다. 순간 그는 심한 갈등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돈을 돌려주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싶었다. 그 때 그의 눈에는 차 속에 모셔둔 부처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생각을 바꿨다. 그 길로 차를 몰아 주민등록에 적힌 주소로 주인을 찾아가 손가방과 현금을 돌려주었다. 돈을 돌려 받은 손님은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 때 그는 손님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우리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례하고 싶은 만큼 절에 가서 시주나  하세요."

불교를 믿는다면서, 절에 나오면서도 진실로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형상이나 거짓으로 부처님을 보려고 한다. 그러나 탐욕과 이기가 가득한 사람은 결코 부처님을 볼 수 없다. 반대로 설사 부처님과 떨어져 있어도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를 사무치게 가슴에 새기고 사는 사람, 허망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보고 여래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가 차에 염주을 걸고, 팔목에 염주를 찬다는 것은 부처님과 함께 살겠다는 다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어떻게 그분과 함께 살아왔던가. 옛날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는 주야육시(晝夜六時)로 부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부처님과 동거하고 있는지를 게송으로 고백한 적이 있다. 참고할 일이다.   

夜夜抱佛眠 밤이면 밤바다 부처를 안고 자고

朝朝還共起 아침이면 함께 손잡고 일어나네.

起坐鎭相隨 앉을 때나 설 때나 항상 붙어 다니고

語默同居止 말할 때나 안할 때나 줄곧 같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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