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信), 버릴 수 있을 것인가?
지성 큰 스님 / 동화사 주지

우리 불교에는 '신심(信心)'과 '발심(發心)'이 있습니다.

신심을 떠난 모든 종교 신앙의 의미는 무의미 할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신심이라는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나 어떤 종교도 발심이라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발심은 우리 불교에만 공유하고 있는 그러한 뜻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보는, 또 우리가 직접 체험해야 할 신심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신(信)'은 하나님이라든지 대상화 객관화 된 그런 '신'이겠지만, 불교가 요구하고 있는 이 '신'은 자기 자신에게 점령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 신조 하나만 확인이 되고 확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세상은 이렇게 어지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경제인은 경제인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군인은 군인, 공무원은 공무원, 언론인은 언론인대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이 신념에 의해서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그리고 이 신념을 다지고 또 다져 가면서 인생을 살아 갈 것 같으면 보람 있는 인생을 사는 그러한 길이 될 수도 있는데, 전혀 자기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허상만 진실인 양 쫓아다니다 보니까 허둥지둥 생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신'은 '청정심이다' 이렇게 합니다. 청정심이 전제된 확신, 이것이 있어야지 청정심이 전제되지 아니하고 물욕에 전제된 확신, 욕심이 전제된 확신, 명예욕이 전제된 확신 이것은 엄청난 자기 인생의 잘못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괴로움과 피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신이 청정심과 결부되었을 때 이 신은 한량없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불교에서 인연을 '발심'이라 합니다.

발심 역시 근본에 대한 생각이 우러나야만 발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다져나가는 것이 발심이요 이것이 구도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는 마음의 종교요, 인간의 종교요, 나아가서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발심이 필요하고, 발심이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과정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깨닫는 것은 근원에 대한 확신이 서야만 깨달음을 요구하고, 깨달음에 걸어가는 것에 우리의 전 생애를 비출 수가 있는 것이지 깨달음에 대한, 본질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것 같으면 어떻게 우리가 평생을 바쳐서 전력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불교가 요구하고 있는 이 신은 그러한 본질적인 문제의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 즉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또, 이것이 신인데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애착이나 집착이나 집념으로부터 벗어나자.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위없는 무상대도의 진리를 보여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가 신 이거 버릴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과연 신 이것이 신앙의 전부이고, 우리 인간의 삶의 전부이며 이걸 꼭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되겠느냐.

'신' 이것 좀 버릴 수 없을까?

모든 부처님을 믿고 모시면은 그것은 곧 지계를 가지고 수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시면 우리는 그것을 수행처다. 만약 지계를 가지고 수행하는 곳이 없다면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부족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 보면 신에 대한 것이 이렇게 있는가 하면 공덕에 대한 문제도 항상 뒤따라 있습니다.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문제를 보면 순조롭게 이루어 질 것 같지만 또 그것이 풀리지 아니하는 것이 참 묘하고도 불가사의합니다. 그래서 신이 도의 근원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되고 그래서 모든 무상대도를 열어 보일 수가 있는 하나의 기능이 되고 그래서 우리 불교의 모든 경에서 공덕이라는 것이 수없이 많이 나열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행위의 결과가 선한 것으로 그것이 맺어졌을 때, 선한 것으로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그것이 발족한다, 복이 있다고 합니다. 복을 짓지 아니하고 우리가 잘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돈을 벌어놔야 돈을 쓰듯이 복을 지어야 그 복을 우리가 쓰고 또 바람직한 생활을 하는데 변함이 없고, 윤택하게 더 잘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량없는 부처님의 지혜 했으니까 지혜도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지혜가 없이 그냥 복만 많이 가지고 살면 그 사람은 살찐 돼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또 지혜만 있고 복이 없으면 그건 또 뭐하겠습니까. 너무나 공허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만 너무 지으려고도 하지말고, 또 지혜만 너무 닦으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도 좀 닦고, 지혜도 있고 복혜가 쌍수를 해야 우리 인간의 삶도 보람된 형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목적은 부자 되고, 잘 살고 떵떵거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도업을 이루기 위해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이상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먹고 잠자고 부유하게 살기 위해서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살찐 돼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우리는 '신'을 버릴 수 있겠느냐.

우리 인간이 취하고 버린다는 이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한다 미워하다 하는 분별심을 끊을 것 같으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신으로써 확립되고 대도를 열어 보이는 길도 되지만, 신은 하나의 극복의 대상이지 신이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도를 깨닫기 위한 하나의 사다리, 나룻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하다고 해서 이것을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항상 중생의 굴레, 인간적인 사람, 너 나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신'도 극복의 대상입니다. '신'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대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대자유인이 되어서 오늘 같은 이 시대에 우리 불교가 사회 모든 병리현상을 극복하고 세계의 문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주역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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