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포교 이철헌 / 불교문화대학
강사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려고 비 오는 저녁 무렵에
택시를 탔다. 도로는 막히지 않았지만
운전하는 분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기어가다시피 하니 뒤차들이 우리가 탄
택시를 쳐다보며 추월을 계속하였다. "내
운전한 지가 50년이 넘는다."는 운전사
아저씨의 말씀이었으나 이제는 칠순이
지나 눈이 어둡고 운동신경이 느려 마치
초보운전자의 실력으로 보였다. 지난 세월의
오랜 경력이나 한 때 실력이 좋았다지만
현재의 운전은 승객이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불교의
현실 또한 이렇지 않은가? 불교가 최상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전 세계 모든 종교인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한반도
전래이후 우리 민족의 생활,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한민족의
역사와 불교는 분리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전 세계는 황금만능주의로
나아가고,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한 기독교
지원과 서양의 물질문명이 밀려들어오면서
불교는 더 이상 한민족 전통종교와 전통문화로서의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오히려 기독교세력에 밀리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는
미군정의 편향적인 종교정책과 선교사업에
대한 지원 등으로 인한 결과이지만 지난날
불교계가 포교에 적극 나서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이다. 지은 대로 거둔다[自作自受]는
교리를 가진 불교가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기보다는
스스로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불자라
하겠는가? 불교도라면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헤아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한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법화경에서는
'깨달음을 열고, 중생들에게 그것을 보임으로서,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그 부처님의
견해에 들어가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한다.
이것이 여래의 유일한 목적이며, 유일한
의무이고, 위대한 목적이며, 위대한 의무이고,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 유일한 동기인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곧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진리를 열어
보이기 위해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진리를 깨우치고
제자들을 가르친 후에 "비구들이여,
유행하라. 많은 중생의 이익과 안녕, 세간을
불쌍히 여기고, 하늘과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날 것을 부촉하셨다.
그리고
여러 경전에서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공덕에
대하여 전하고 있는데, 현자오복덕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면 다섯 가지
복덕이 있으니 첫째는 장수함이요, 둘째는
크게 부유함이요, 셋째는 단정함이요,
넷째는 명예가 멀리 나아감이요, 다섯째는
큰 지혜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강경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보배를 보시하는 공덕보다, 이 경의
사구게라도 수지하여 남을 위해 설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법보시가 가장 수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을 받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설하는 포교야말로
공덕을 짓는 일이요, 불자의 사명이자
의무인 것이다.
청년
포교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포교와
대학생들의 조직인 대불련, 각 지역과
사찰별의 불교청년회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군포교는 군법사들이 하고 있으나
군법사들의 숫자가 태부족인 상태이고
물질적인 많은 지원을 필요로 하다보니,
전략적으로 군 포교에 임하는 타 종교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이다. 대불련도 종립대학교를
제외한 모든 대학교에서 취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리 활동의 풍조에 밀려 신입회원
수가 점차 줄어들어 가고 있으며, 지역불교청년회
또한 십여 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법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청년 포교가 한계에 이른 것은 불교계에서
청년 불자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사의 활동이 헌신적인 경우 군 불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지도법사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으면 각 대학의 불교청년회도 잘 운영되고,
주지스님이 적극 지원하고 있는 사찰의
경우 청년회의 회원이 많고 그 활동이
활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늦게나마
불교계에서 청년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청년 포교에 대한 지원과 노력을 하고
있으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나
실질적인 노력은 아직도 미비한 실정이다.
청년
포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 포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불교계의 절실한
인식이다. 현실적으로 당장의 사찰재정에
보탬을 주는 것은 노인층과 부녀자들이고
보니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기도법회가
열리고 있다. 불공의식만으로 진행되는
초하루, 보름, 관음제일 등의 기도에 비해,
청년들에 대한 법회는 매주 법문을 하여야
하고, 재정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며, 혁신적이고
반항아적인 그들과 함께 호흡하기에는
힘든 처지이다 보니 사찰 측에서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식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고통을 알아야만 그들에게 알맞은 처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한 문제는
이성, 학업, 취업 등이며 이러한 일들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많은 대화와
사회전반에 대한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청년들이 스님과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님과의 가로막힌
벽이 허물어져야만 한다.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출가한 스님들이
세속의 모든 일들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청년 포교에는 포교사나 장년 불자들의
지도와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대중화, 현대화, 현실화된 포교프로그램이
갖추어져야 한다. 청년들은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세대이다. 그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지 않고 옛날의 전통과 문화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포교에 태만한 것이요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법회 때에
법문을 하고 회보를 발행하여 문서포교를
하는 것은 이미 옛날의 구태의연한 방식이다.
불교는
교리뿐만 아니라 그 수행의 체계나 방법이
다양하고 과학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그
어느 타종교보다도 현대인의 구미에 맞출
수 있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사찰
음식을 통한 음식문화개선, 선 체조와
명상을 통한 다이어트와 학업 성취, 자연환경을
이용한 생태학습 등 청년들의 주된 관심사에
여러 가지 방안으로 다가가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이 필요하다. 설법중심의 법회와
더불어 화상을 이용한 법회, 명상음악을
이용한 법회, 인터넷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이용한 법회 등 다양한 포교방법을
활용하여 청년들의 흥미를 유발하여야
한다.
그리고
청년 포교에 대한 중요성을 일반 신도들에게
적극 홍보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제적 지원을
비롯한 많은 협조를 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타종교에 비하여 불자들의 조직은
결속력이 약하여 사찰 밖에서는 별다른
활동이나 유대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청년회의 노련함과 경험을 지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신도회와의 결속을
통하여, 신도회는 활력을 가질 수 있고
청년회는 지원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사찰은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은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활동이 곧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므로 이들에 대한 불교포교는
불교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인 것이다. 지난날 청년 포교에
소홀히 한 탓에 현재 정부의 주요 관직이나
사회 중요 요직에 기독교 신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종교에 관한 정책입안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등 전반에 있어
이들의 입김이 거센 것이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대로 자연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하므로 그들은 편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불교계에서는 미래의 인재를 키워야 한다.
청년은 식물로 보면 묘목이라 할 수 있고
계절로 보면 여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폭염의 태양아래 나무를 손질하고
병충을 막지 않으면 가을의 결실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싹이 자라지
못하면 꽃도 열매도 없다는 것은 알면서도
조상이 가꾼 나무의 과실을 따먹고 살
뿐, 씨를 뿌리고 가꾸지 않으려 한다.
누구나 꽃을 좋아하고 과일을 얻는 것은
즐거워하나 씨를 뿌리고 어린 싹을 기르는
것은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나무도 수명이
있어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은 잊은
채 우선 과일 따먹기에 급급한 불교계의
현실을 깊이 반성하지 못한다면 과연 불교가
지혜를 가르치는 종교라 할 수 있는가?
장년과
노인층의 포교는 현재의 불교를 위한 것이요,
어린이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교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이다.
청년 포교 없이는 미래의 불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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