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에서 오는 일상의 오해
무구(無垢)스님 / 동국대병원 법사

얼마 전의 일이다. 도반 스님과 차를 몰고 가는데, 뒤에서 트럭 한 대가 바싹 다가오면서 상향 등을 자꾸 깜빡거렸다. 나는 빨리 가든지 아니면 비키라는 줄 알고 속으로 화가 났다. 그 길은 편도 일차선에, 그 날은 일요일이니 비킬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마침 집을 짓기 위한 공터가 있어서 짜증도 나고 따라오는 차도 보내주기도 할 겸해서 우측 깜박이를 넣고 그곳에 차를 서서히 바쳤다. 그런데 그 트럭도 따라와서 섰다. 나에게 시비를 걸려는 줄 알고 나도 약간 좋지 않은 인상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창문을 열고 자상하게 차에서 연기가 많이 나니 점검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니 아닌게 아니라 차에서 심하게 타는 냄새가 났다. 달릴 때는 냄새가 뒤로 가 잘 몰랐는데 세우니까 이제 그 냄새가 난 것이다. 알고 보니 휴게소에서 출발하면서 주차 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달렸던 것이다. 조금만 더 달렸으면 아마 불이 났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기사님은 나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을 애태웠을까. 그런 줄도 모르고 비키라는 줄 알고 오해를 했으니 나의 그릇된 견해가 큰일을 부를 수도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이미 그 차는 떠나고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기사님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 일이 나에게도 있었다. 자동차 뒤 트렁크 위에 옷이 올려진 채 운전하는 차를 발견했다. 아마 차를 세우고 볼 일을 보면서 옷을 차 위에 올려놓았던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그냥 가는 모양이었다. 그 차는 서서히 달렸는데, 바람이 불거나 속도를 내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크락숀을 누르고 상향 등을 켜기도 하며 온갖 신호를 다 보냈다. 그러나 앞차는 끄덕도 하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달리기만 하더니 내가 신호를 보낼 때마다 더욱 속력을 내는 것이었다. 분명히 나의 신호를 보았을 것인데, 내가 빨리 가라든지 비키라는 소리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길이 달라서 서로 헤어지고 말았지만 나중에 옷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운전자를 생각하니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뒤차가 상향 등을 켜거나 크락숀을 울리면 으레 비키라는 뜻으로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똑같은 한자(漢字)가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 있고 과일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도 과일 도둑이 아닐 수 있는데 말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남보다 내가 먼저 가겠다는 인간본연의 경쟁심이 반복되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순수성을 퇴색시킨 결과가 아닐까 싶다.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수를 순수로 느끼지 못하는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를 포함해서 양복을 자동차 뒤에 올리고 달리던 운전자도 뒤의 운전자로부터 수없이 빨리 가라고 시달림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뒤에서 어떤 신호가 와도 무시하고 앞으로만 달리는 것이다.

잘못된 인식 때문에 분노로 인해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마음상태, 세속적인 견해 즉 업의 소유자로서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전환으로 실상을 바로 보는 수행을 해야한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 바로 그것이다.

《상응부경전》에서 부처님은 正見은 물에 얼굴을 비춰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만약에 물이 빨강이나 파란 물감으로 흐려 있다면 사람이 제 얼굴을 비춰봐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온갖 탐욕으로 흐려 있을 때는 마음이 맑지 못하므로 무엇이든 그대로 비추지 못한다. 또 만약에 그 물이 불 위에서 끓고 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역시 얼굴을 비춰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노여움으로 끓고 있을 때도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중략) 바라문이여, 그와 반대로 물이 흐려 있지도 않고, 끓고 있지도 않으며 이끼로 덮여 있지도 않다면 제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탐욕으로 흐려 있지 않을 때, 노여움으로 끓고 있지 않을 때, 어리석음으로 덮여 있지 않을 때에는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올바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正見, 곧 올바르게 본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기초가 되는 것이다.

비록 고통에 차서 매우 힘들면서도 그 고통을 참아 내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 살더라도 바른 견해 즉 정견을 더욱 늘리면 번뇌와 집착이 없어 괴로움이 소멸된다.

다른 사람과의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맑힐 수 있어야한다. 마음을 그때그때 열어야 한다. 마음이 열려야 갈등과 대립이 사라지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으로 흩어져 있는 마음을 가다듬고 고요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선 바른 견해가 무엇인지 알고

바른견해를 늘리는 수행을 알면

분노와 고통스러운 세상이

환희로운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더러운 법 가까이 하지 말고

함부로 굴거나 게으르지 말며

바르지 않는 견해 익히지 말지니

그것은 이 세상을 불국토로 자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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