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부채의 노래
강석근 /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綠筠作團  裝以氷?       푸른 대나무로 둥글게 만들어 / 흰 비단으로 장식하였네

겆風自來  不召不招      시원한 바람이 저절로 불지만 / 부르지도 오라지도 않았네

哀哉三界  煎脇如窯      슬프도다! 삼계는 / 뜨겁게 달아오른 가마와 같네

願以此扇  是?是採       바라노니 이 부채를 / 휘젓고 흔들어  

濯之以淸  救爾之焦      맑은 바람으로 깨끗이 씻어내어 / 불타오르는 네 마음을 구하라

                                                  <동국이상국집 전집 19권, 단선명(團扇銘)>

 

위의 작품은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둥근 부채의 노래>이다. 부채는 여름에 더위를 쫓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다. 그래서 옛날 조정에서는 관리들에게 여름에는 부채를 겨울에는 책력을 선물로 내렸다.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여름은 부채의 계절이다. 이런 까닭으로 여름과 부채는 다정한 애인처럼 떼어버릴 수 없다. 그러나 철지난 부채는 버림받은 여인으로 상징되어 왔다. 부채에 대한 이런 문학적인 논리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부채는 불법을 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의 단락은 1 2행으로 부채의 둥근 외형과 푸른 대나무와 하얀 깁으로 만들어진 소재 그리고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부채의 기능을 서술하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은 3행으로 깨치지 못한 이들이 사는 세상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인 삼계(三界)를 불타는 가마에 비유하고 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휩싸인 중생들이 사는 이 세상은 불타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인 4 5행은 부채로 청풍을 일으켜 불타오르는 탐욕을 잠재우고 자신의 마음을 구제하라는 내용이다. 곧 맑은 바람으로 마음을 정화시켜 깨침의 경지에 이르라는 주문이다. 이 점은 작자 스스로에게 제시한 목표인 동시에 타인에게까지 요구하는 이타적인 법문이기도 하다.

명(銘)은 영원히 잊지 않을 글들을 쇠와 돌에 새기는 문체로서 자신의 주위에 두고 항상 마음을 돌아보는 좌우명(座右銘)과 같은 글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직설적인 표현이 특징인 동시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유심론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한 편의 빼어난 게송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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