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깨달음의 길 최종석 / 불교문화연구원
부처님께서
마가국의 나라촌에 계실 때였다. 사리불
존자도 부처님과 함께 있었다. 그때 사리불과
옛 친구였으나 지금은 외도를 수행하고
있는 잠부카다카가 사리불을 찾았다. 그는
사리불에게 물었다.
"무엇을
열반이라 말하는가?"
"열반이란
탐욕을 영원히 없애고, 성냄을 영원히
없애며,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어 모든
번뇌를 다한 것이니라."
"열반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여덟까지
바른 길(八正道)이 있으니, 팔정도는 바르게
사물을 보고 나아가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니라."
이
대화는 잡아함경에 나온다. 열반이란 바로
우리 모두가 얻고자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 모든 번뇌가 사라진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 열반에
이르려면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껏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또는 '깨달음을
얻으면 어떤 변화가 오는가?' 하고 '무엇'
'어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실 열반이 무엇인지, 열반이
어떤 경지인지 아직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알 수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깨달음 얻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어떻게'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여덟
가지 깨달음으로 가는 거룩한 길'은 바로
우리가 이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 그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준 길이다. 그런데 이 여덟 가지의
방법이 한결 같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보통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무언가 다르고
비밀스럽다고 여긴다. 심지어는 초현실적인
비술(秘術)처럼 생각하여 일반 범부(凡夫)는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길로 여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비록 열반은 초세간적(超世間的)이지만
열반에 이르는 길은 세간적(世間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열반도 초세간적이고
그곳을 향해 가는 방법마저도 초세간적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길을 갈 수 없다.
세간과
초세간 즉 현실과 초현실을 비행기의 이륙에
비유해 볼 수 있겠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하늘을 날려면 힘껏 활주로를 달려야 한다.
활주로를 달리지 않고 비행기가 하늘로
날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을 떠난 초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세간을 무시한
초세간이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초세간이나
초현실은 세간이나 현실을 전제로 할 때에나
성립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철저히 현실적일
때 그 안에서 초현실적인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정도도 철저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윤리이기에 우리는
그 길을 통해 초세간적인 열반을 얻을
수 있다.
그
여덟 가지 길 중에서 다섯 번째의 길이
정명(正命)이다. 정명은 올바른 직업을
통한 올바른 의식주(衣食住)를 말한다.
즉 인간의 의식주란 거의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의식주는 바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기본적인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명은 자신의 삶을
본능적 욕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이 근원적으로 연기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삶의 모습이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서로 인연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며, 서로서로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의식주 중에서 먼저 의(衣)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안델센 동화에 허영에 찬
임금의 이야기가 있다. 그 임금은 옷으로
자신을 꾸미는 일을 최상으로 삼았다.
그는 온갖 진귀한 옷을 다 사들여 입었으나
성이 차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기술이
좋은 재단사를 초대해서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옷을 짓게 하였다. 재단사들은 임금의
허영을 알고 옷을 짓기는커녕 임금을 알몸으로
벗겨 놓고 짐짓 임금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임금은
그것을 믿고 마을 행차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각자 자신을
속이면서 벌거벗고 있는 임금님에게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고 칭찬한다.
이 때 한 소년이 임금님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벗고 있다고 소리를 치자,
너도나도 수군거리고, 군중들은 급기야
소리치며 웃는다. "임금님은 옷을
안 입고 벌거벗고 있다."라고.
이
동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임금의
옷에 대한 집착과 허영을 말하는 동화이다.
허영과 집착은 바로 어리석음과 탐욕이
만들어낸 것이다. 요즘 우리들의 옷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도 벌거벗은 임금님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맞는 옷을 고르기 보다 대중적인 유행에
맹목적으로 집착한다. 그 옷을 입지 않으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소위 유행을 따라 옷을 선택하고
입는다. 이것은 대중(大衆)의 옷에 대한
맹목이고, 허영이고 집착이다.
이제
다시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정명(正命)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삶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생명 무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루어진다는 연기의 진리에 비추어
보면, 사실 나의 이웃이 곧 나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고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이웃을
존재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따라서 너와 내가 다른 옷을 입고 있다고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진실된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옷은 우리를
이웃과 존재적으로 구별시키고 갈라놓는
것이 아니다. 옷이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깨달음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옷으로 자신의 인격을
나타내 보이려 하지 않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의 아름다움으로 주위를 향기롭게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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