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쉰다는 것은
김재섭 / 인문과학대 사회복지학과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어 이번 학기도 이제 거의 종점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동안 과행사다 동아리 행사다 뭐다 해서 정신이 없을 만큼 바쁘게 뛰어다녔다. 이곳 저곳 모임에 참가하다 보니 나의 몸과 마음은 어느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문득 어느 날 자기 전에 녹차 한잔을 마시다 보니 펜을 잡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써 본다.

나는 천성적으로 쉴 수 없는 성품을 지니고 태어난 것 같다. 어느 자리에 가든 나는 항상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내 딴에 이렇게 바쁜 생활이 재미있고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바쁘게­적어도 대학생활 안에서는­생활했다. 이런 바쁜 나날이 몇 개월 되풀이 될 무렵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편안히 앉아 쉬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 바쁘게 뛰어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의 천성이 발동한 것일까. 나는 또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쉴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매번 바쁨 속에서 나의 마음 한 구석의 한없이 시린 느낌은 정말인지 나로 하여금 미치도록 했다. 이런 나를 되돌아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업(카르마)이구나 하고.

그러고 보니 나는 소위 불교를 믿는 불제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불교에서는 업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업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업은 무엇인가? 명승(名僧)들의 책을 읽어도 업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책을 읽어도 마치 꿈인양 허공에 뜬구름을 잡는 듯 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 때 다시 하나의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고등학교 때 다니던 불교모임의 담당 비구니 스님께서는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무엇이든 치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일순간 모든 것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랬다! 치열해야 했다. 무엇이든 치열하게 했어야 했다. 여기서 나는 다시 나의 생활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생활은 과연 치열했는가?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온다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다만 부끄러울 따름이다. 매 순간 순간마다 나는 회피하기에 바빴다. 단지 겁이 난다는 이유로 이 모든 순간을 회피하기만 했던 것이다. 매번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렇지만 결과는 이렇게 나왔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어." 하는 식으로 합리화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런 합리화조차 할 시간이 없을 만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계속 나를 따라 다니는 한 가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 한구석 한없이 시린 것의 정체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이것조차 그다지 좋지 않은 합리화의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은­생활을 했는가, 최선을 다해 생활을 했다면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일순간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린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쉰다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이처럼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자가 과연 쉴 수 있겠는가. 쉬는 자들은 자신의 생활에 충실했기 때문에 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쉴 수 있는 자격이 안 되는 것이다.

아마 나는 쉬는 것에 대한 대답을 이미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없이 바쁜 것이 나에게 쉬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앞으로 갖고자 하는 직업(사회복지사) 또한 쉬어서는 안 되는, 쉴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내가 부지런히 움직임으로서 타인은 쉴 수 있게, 혹은 편안히 될 수 있게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해법을 찾게 되었다. 내가 움직임으로서 타인이 좀더 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쉬는 길이라고. 그리고 아직 내가 쉴 차례가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잠시 쉬기를 갈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자들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닐 것이다. 비록 누군가가 바보같이 쉬지도 않고 일을 하냐고 비난 내지 질책을 해온다면 나는 그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이 자신이 쉴 차례이지만 앞으로는 자신도 얼마든지 일할 차례가 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쉬는 것에는 한 가지 조건이 따른다. 바로 치열하게 생활한 자만이 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쉰다는 것은 내가 치열하게 생활했을 때에 나는 비로소 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쉬는 것은 참으로 쉬는 것이 아니오, 다만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진실로 치열한 자 만이 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합리화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합리화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진실로 자신에게 치열했을 때 비로소 쉴 수 있는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극복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아닐까 하고 감히 짧은 머리로 이런 말을 해본다.

무딘 머리로 여기까지 쓰다 보니 어느 덧 찻잔의 녹차는 식어 있었고 졸음이 점점 밀려와 눈꺼풀이 천근이나 되는 듯 자꾸만 감겨 왔다. 나는 찻잔의 녹차를 마저 비우고 다시 일상으로 들어가고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며 다시 생각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일상에 젖어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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