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산에서 우물 속의 달을 노래함
강석근 /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山僧貪月色      산 속의 스님이 달빛을 사랑하여
幷汲一甁中      한 항아리에 물과 함께 길어 갔네
到寺方應覺      절에 도착하면 응당 깨달으리라
甁傾月亦空      항아리 비우면 달빛 또한 공한 것을

                                        <동국이상국집 후집 1권, 山夕詠井中月, 두 번째 시>

 

이 시는 백운거사 이규보의 <저녁 산사에서 우물 속의 달을 노래하다(山夕詠井中月)>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한 편의 짧은 시속에 불교의 공사상(空思想)과 시적 서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저녁 산사의 정경을 노래한 이 시는 후대인들이 엮은 시선집에 가장 빈번하게 인용된 이규보의 대표작이다.

선가(禪家)의 논리에 따르면, 산승의 본분은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물인 달빛도 탐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병이 된다. 불교에서 달은 부처님의 법과 진여(眞如)를 상징하는 사물이지만, 이런 생각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잘못된 행위이다. '모든 법이 공[諸法皆空]'하다는 공사상의 논리로 보면 여러 사물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사멸해 가는 실체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공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하늘의 달조차도 허공의 꽃에 불과한데 물 속에 비친 가상의 달빛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적 화자에게 산승은 아직 절대적 경지를 깨치지 못한 수행 중인  승려이다. 산승은 우물에 비친 달빛을 진상으로 오인하고, 항아리에 물과 함께 애지중지 길어 갔지만 항아리의 물을 비우면 달빛이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적 화자는 허상에 불과한 달빛에 집착하는 스님을 나무라며, '모든 법이 공'하다는 불교의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진리는 이론적으로는 그 근본에 접근할 수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쳐야 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이 점을 넌지시 시로 일깨우고 있다.

이규보는 스님들에게 준 많은 시법시(示法詩)를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스님들에게 전한 바 있다. 이로 보아, 거사(居士) 이규보는 불교를 좋아하는 단순한 문인이 아니라 깨침의 세계를 추구했던 수행인인 동시에 자신의 경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한 시대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이 한 편의 시는 조용히 증언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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