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수행 이야기
최광호 / 불교문화대 불교학과 졸업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은 따지자면 꽤나 오래 된 듯 보인다. 내가 태어난 곳이자 부처님과의 인연을 처음 맺은 곳은 안동 봉정사의 사하촌(寺下村)이다. 예전의 큰 절 아래에 있던 마을이 다 그렇듯 마을 사람들은 절의 토지를 경작하고 절에서 큰 법회가 있을 때면 늘 여러 가지 노력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그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기묘하게도 나의 부모님이 서로 처음 얼굴을 본 것은 봉정사의 초파일 봉축법회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당시 절에 머물고 계셨는데, 초파일법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마침 절에 와 있던 어머니를 보게 된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두 분은 결혼을 하셨고 내가 태어났다.

초등학교도 가기 전 어린 시절 가끔 초파일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간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이다. 경주 시내에는 지금도 대릉원 후문을 마주 보는 곳에 법장사라는 작은 절이 하나 있다. 날씨가 조금은 차가워지는 중학교 3학년 11월의 어느 날, 그곳에서 난생 처음 법회를 참석하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서 거기까지 가게 됐는지는 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청소년기의 방황이나 혼란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항상 있어왔고 내게 있어서도 유별났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가 고민했던 문제는 묘하게도 어떻게 살 것 인가하는 문제였다. 어떤 답을 찾는 다기보다는 그냥 무언가 있을 것 같아서 찾아간 곳이 그 곳이었다. 그때 이후로 고등학교 3년 동안을 내내 주말이면 법회를 나갔고 대학에선 불교학을 공부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인연의 끈에 이끌려서 살아 온 게 아닌가 싶다.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었기에 조금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부처님과의 인연을 이어온 게 내가 살아온 모습이 아닌가 한다.

요즘의 나는 이러한 인연에 감사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내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믿음이 깊어지고 수행이 올바르고 원만해져야 할텐데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속세에 물들고 오염된 마음만이 쌓여서 헛된 욕심만이 늘어간다.

자성(自性)은 청정(淸淨)하다고 했다. 우리가 가진 본래의 마음은 맑고 깨끗하지만 홀연히 무명(無明)이란 어둠이 일어나서 이 본래의 마음을 가린다. 때문에 무명(無明)이 없으면 이 마음은 언제나 청정(淸淨)하다. 청정하다는 건 단순히 맑고 깨끗하다는 정도의 뜻은 아니다. 번뇌도 없고 욕망도 없어서 삶과 죽음을 넘어선 그 마음이다. 현재에 살면서도 또한 영원을 살아가는 그 마음이기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부른다. 하지만 무명은 홀연히 일어나는 것이기에 한번 가려지면 우리의 마음은 수많은 장애와 번뇌, 욕망을 만들어 내고 만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내 마음이 곧 번뇌와 욕망에 묻혀 버린 마음이 아닌가 싶다.

얼마전 한 스님이 쓰신 휘호 중에 "마음으로 보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말고 마음으로 그 인연을 관조(觀照)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게 어떤 것이든 눈으로만 현상을 볼 때 우리는 그 현상의 피상적인 겉모습만을 보게 된다. 거기에서 오해와 편견이 생겨나고 반목하게되고 대립하게 된다. 마음으로 관조할 때는 나타난 현상의 이유와 내면들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고 깊이 통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삶을 살아가는 보다 깊은 지혜가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현재의 내 모습이 이런 모습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에 쫓기다보니 어떤 여유도 없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명상에 잠길 여유는 고사하고 절을 찾아본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하다. 시간은 흐르고 한해 두 해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무엇하나 만족할만한 게 없다. 그러면서 최근에 들어와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이제 수행을 좀 해야겠다는 것이다.

수행이란 게 말로 하면 참 거창해 보인다. 스님들처럼 동안거, 하안거 결제에 들어 일심으로 석 달 동안 좌선에만 전념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은 재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참선방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재가에 있는 이상 그런 수행은 정말 쉽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고나 할까 그런 것을 나는 수행이라 이름 붙였다. 기도라고 하면 흔히 부처님 앞에서 소원을 빌고 이루기 위한 것이 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보다는 마음을 맑게 가지기 위한 기도라고나 할까.

오늘날 우리는 무언가에 진심으로 고개 숙이는 일이 없어졌다. 하루에 한 때만이라도 나는 고개 숙이는 연습을 한다. 그때만이라도 진심으로 경건하게 아주 진실한 마음을 가지는 연습을 한다.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는 것을 절 집에서는 하심(下心)이라고 해서 갓 출가를 결심한 행자들의 기본 마음가짐으로 되어있지만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출발점이면서 또한 완성이다.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때 나는 자신의 본래 마음이 나타남을 느낀다. 이기심에서도 떠나고 번민과 욕심에서도 떠난다. 청정한 자성의 모습을 찾는 것이 멀리 있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이 일체중생을 예배하며 부처님이라 칭송했듯이 그런 수행을 나는 하지 못하지만 부처님 앞에서만은 진실한 마음이 되고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마도 앞으로도 아주 치열하게 참선을 하고 용맹하게 정진을 할 기회를 가지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 앞에 잠깐 예배하는 것으로 내가 가진 내면의 진실한 모습을 보는 내 나름의 수행을 나는 계속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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