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華亭)에 사시던 선자(船子) 스님을 그리며
강석근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夜寒江冷得魚遲          추운 밤 차가운 강의 고기잡이 더뎌서

棹却空船去若飛          빈배에 노질하여 나는 듯 돌아왔네

千古淸光猶不滅          천년 달빛은 아직도 바래지지 않았건만

亦無明月載將歸          장차 싣고 돌아갈 밝은 달빛은 정녕 없네

                                                      <동국이상국집 11권, 華亭船子和尙>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화정에 사시던 선자 스님을 그리며>라는 이 작품은 당(唐)나라의 선자(船子) 덕성(德誠) 스님의 풍모를 읊은 시이다. 선자 스님은 화정 지방의 오강(吳江)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다가 선지식을 만난 뒤 배를 버리고 입산한 분이다. 법을 전하기 위해 지은 스님의 시 가운데  五燈會圓(오등회원) 에 전하는 한 편의 선시는 품격이 남달라 후대의 수많은 시인들에게 애송되었고 또 차운되었다. 특히 이규보와 진각국사 혜심(慧諶)에 이어  제왕운기 를 쓴 이승휴, 그리고 조선초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시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월산대군의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라는 시조는 무심의 마음을 노래한 수작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이규보의 문학적인 재능과 선학(禪學)에 대한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기 승구는 추운 날 밤 배에서 낚시하다 귀가하는 어부의 정경을 읊었고, 전 결구는 달빛을 매개로 깨침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서술하였다. 달빛은 불가에서는 불법을 상징한다. 영겁의 세월 동안 쉬지 않고 비친 달빛이 배에 가득 넘치는 밤인데도 싣고 돌아올 달빛조차 없다는 표현에는 선적(禪的)인 파격이 들어있다. 선자 스님 시의 결구가 "공연히 빈배에 밝은 달빛만 싣고 돌아오네(滿船空載月明歸)"인데 비해 이규보의 시구는 "장차 싣고 돌아갈 밝은 달빛은 정녕 없다"며 역설로 강조하고 있다. 스님의 시구는 자연스러운 시상을 가진 서정적인 구절이고,  이규보의 결구는 선자 스님을 선적인 표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가(禪家)의 논리를 체득해서 배에 비친 달빛까지 모두 비워낸 관계로 이규보에게 선자 스님은 불법의 진리를 깨친 진정한 자유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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