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성도(聖都) 캔디
김미숙 / 불교대학 강사

스리랑카 캔디(Kandy)에는 지상에서 빛을 발하는 불교도의 북극성, 불치사(佛齒寺)가 있다.

성스런 도시 캔디.

1988년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된 연유는 그렇다. 캔디가 성스러운 이유, 그 첫째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달라다 말리가와(Dalada Maligawa), 즉 불치사가 꼽힐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가 보기를 고대하는 곳이 캔디이다. 그 까닭은 부처님의 진신 치아 사리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간 사람들이 불치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란 일년에 단 한 차례뿐이다. 불치 사리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날, 바로 페라헤라 축제(Esala Perahera)가 열린다.

에살라 달(7, 8월 즈음)에 열리는 페라헤라 축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명해서 캔디를 중심으로 한 스리랑카 전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토산품으로서 가게를 비롯해 곳곳에 걸려 있는 바틱 제품들에도 어김없이 문양 소재로 등장하는 이 축제의 저간 배경을 알지 못하면, 그토록 수많은 바틱 제품에 왜 그리 비슷한 풍경이 담겨지는지 의아스러울지 모른다.

독특한 바틱 문양, 정지된 축제의 한 장면! 긴 코끼리의 행렬 주변에 펼쳐지는 흥겨운 사람들의 춤사위는 남방 특유의 풍물과 어우러져 이방인들의 눈을 금새 사로잡고 만다.

불치가 스리랑카에 들어온 것은 4세기경이라고 한다. 쿠쉬나가라에서 다비되었던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아누라다푸라에 들여온 이는 오릿사 주의 한 왕자였다고 전한다. 그는 자신의 머리털 속에 숨겨 온 사리를 왕에게 바쳤다. 그 후로 불치는 왕권의 상징으로서 불치를 소유한 이가 곧 권력의 수장을 뜻했으며, 불치의 소재지는 나라의 왕도가 되었다.

현재 싱할라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불치사의 본당 건물은 홍차 빛의 지붕과 우유빛 채색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 앞쪽에 놓여 있는 팔각 원당형의 건물, 팟티릿푸와(patthirippuwa)는 19세기 초엽에 왕이 세운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불치에 대한 의례가 매일 세 차례씩 거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절정은 페라헤라 축제라 할 것이다.

축제가 시작되면 관악기와 타악기가 중심을 이룬 전통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코끼리의 행렬이 이어진다. 앞서서 이끌고 있는 코끼리를 비롯하여 한껏 치장하고 모양을 낸 행렬이 길게 이어진 중간에 황금빛 일산 아래 사리함이 안치된 코끼리가 거리에 등장하면 축제는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캔디 댄스까지……. 캔디 왕조 시절 궁정 연회석에서 펼쳐지곤 했던 춤은 현재 스리랑카의 민속 무용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페라헤라 축제 때에도 가장 많은 이목을 끌고 있다.

이처럼 거국적인 축제의 구심점이 되어 있는 캔디의 불치는 단순히 종교적 숭배의 대상만이 아니다. 그것은 스리랑카의 국민 통합을 상징하며, 국가의 주권을 상징한다. 스리랑카 사람들의 최상의 자부심은 포르투갈, 네델란드, 영국 등의 침략에 맞서서 사투를 벌인 끝에 지켜 낸 것도 바로 이 성스런 ‘불치’라는 데 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인들이 스리랑카를 점령한 뒤, 불치를 빼앗아 부숴 버리려 했으나 그들이 습득했던 치아 사리는 위장된 가짜에 불과했다. 더러 말하기를, 불치가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크다고 하지만, 그 또한 진짜 불사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일축되고 만다.

진신 사리를 볼 수 있는 페라헤라 축제 때가 아닌 평상시의 순례객은 불치가 담긴 사리함에 예배를 드리는 긴 행렬 끝에 줄을 서야 한다. 사리함을 보관하는 성소 앞에 예배하기 전에 마주 대하는 것은 불치사의 또 다른 보물, 크리스털 불상이다. 진홍빛 천을 배경으로 무심히 앉아 있는 투명한 불상은 오가는 불심을 수습하는 듯, 불치의 화신인 양 여겨진다.

불치사 외에도 캔디 호수 주변에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말왓타(Malwatta) 승원과 아스기리야(Asgiriya) 승원이 있다. 스리 비르라마 라자싱하가 12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호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캔디의 순례 일정은 하루가 모자랄 만큼 풍요롭다.

1484년 왕도가 캔디로 옮겨진 이래 1815년에 스리 비크라마 라자싱하가 영국의 포로로 잡힐 때까지 지정학적 중심지로서의 명맥이 유지되었던 캔디. 스리랑카 왕조의 최후의 도읍지였다는 역사적 배경 덕분에 캔디는 ‘스리랑카에서도 가장 스리랑카다운 곳’이라 불리고 있다. 하지만 외지인들에게는 캔디,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더욱 인상 깊은 도시이다. 천혜의 자연 조건이 펼쳐 놓은 풍광은 여행객에게는 말 그대로 잠시 머물러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을 주는 곳이다.

혹자는 말한다. 스리랑카라는 섬 하나에 인도를 비롯한 서남 아시아의 모든 문화가 집약되어 있다고.

유서 깊은 불교 문화뿐 아니라 힌두교로 대변되는 인도 문화의 정수와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온갖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스리랑카에서 매달 불교식의 만월제 행사를 거행하고 있는 데에는 불치에 대한 숭배가 그 근저에 깔려 있을 것이다.

불치사 곳곳의 천장 가득히 매달려 나부끼던 불교기가 유독 잊히지 않는 까닭은 그 깃발에 담긴 불심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똑같은 깃발을 불교기로서 인정하고 있건만, 그 깃발로 절을 장식하는 데는 인색한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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