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의 의미
법공 스님 / 불교문화대학 강사

산사로 들어가며 우리는 제일 먼저 일주문(一柱門)을 만난다. 사찰에 들어가 부처님을 참배하려면 예전 우리들 부모님들 같으면, 그 전날부터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였다. 또한 음식도 비린 것, 누린 것 등은 가려서, 그 몸과 마음을 함께 청결히 하여, 스스로 심신을 엄격히 다스렸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요즈음은 도심 가운데에 포교당이 생겨 그 출입이 쉽게 되었고, 도심 속의 영향인가 음식에서 오는 여러 가지 관념도 많이 완화되는 감을 느낀다.

사찰의 양식 또한 세태의 변동 속에서 자꾸만 바뀌어 간다. 특히 도심 가운데의 대표적 양상인 아파트 빌딩 속의 포교당에서는, 사찰을 대표하는 일주문이란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고, 그것은 깊은 산사의 고찰이 아니면 보기 힘들게 되었다. 양식이란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변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격식이나 겉모양에도 원래 그것이 표현하는 바의 뜻과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일주문이라 하는 것은, 사찰에 들어갈 때 제일 첫 관문의 형식을 띄고 있다. 물론, 그것은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며, 다시 사찰과 바깥을 구분하는 경계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바세계와 정토세계의 개념은, 일주문을 놓고 그 경계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비단 불교적 관념일 뿐만이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교회의 문도 이러한 개념이 될 것이고, 성당의 문 또한 같은 엄숙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비종교적인 곳에서 종교적인 마음으로 색채를 칠하려 할 적에는 이러한 공간적인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에 이르기까지는 일주문―사천왕문―해탈문을 통해야 하는데 일주문에서 제일 먼저 도달하는 사천왕문까지의 거리는 사찰에 따라 일정치 않다. 일주문이라는 뜻은 부처님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하나의 기둥과 같이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양단된 생각을 내고 살아가고 있다. 결정하기까지에는 심사숙고가 필요하지만, 일단 하나로 정하여지면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을 하여야 무슨 일이든 이룩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일주문 밖인 사바세계에서 한 청년이 수행자의 신분이 되려고 한마음을 기둥과 같이 세웠다면, 이 같은 굳건한 서원은 어떻게 성취시켜야 옳을까? 이는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모든 허물을 씻어 없애는 참회의 가르침을 닦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까지 아니하더라도 사찰을 방문할 때 우리는 일주문을 넘어서기까지의 혼란스러운 마음가짐을 돌이켜 봄으로서 참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수행 역시 자기의 근기를 알아서 정진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방법론으로는 포교, 간경, 염불, 주력, 참선 등의 방법이 있어 자신의 그릇을 파악하여 어떻게 수행을 하여야 할까 하는 데에 있어서도 참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점찰선악업보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본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선정과 지혜를 수행해 내지 못 할 것이니, 먼저 참회의 가르침을 닦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전생으로부터 버릇이 되어버린 악한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현세에서도 반드시 악을 많이 짓게 마련이어서 십중금계[十重禁戒 : 1생물을 죽임, 2훔치는 것, 3간음, 4거짓말하는 것, 5술에 취함, 6보살과 비구·비구니의 죄과를 설함, 7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함, 8보시(베풀기)에 인색함, 9노하여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음, 10삼보(佛法僧)를 비방함)를 범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십중금계를 범하는 까닭에, 만약 참회하여 마음을 정화하지 않은 채 선정과 지혜를 수행하는 사람은, 장애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이겨내지 못해서 마음이 혼란에 빠진다든가, 또는 외도의 가르침을 즐겨 받아들임으로써 악견(惡見)을 증대시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은 먼저 참회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계법(戒法)이 청정하고 숙세의 중죄가 작아진다면, 그때에는 모든 장애를 떠날 수가 있게 된다.”

즉 다시 쉽게 말한다면, 흙탕물에 뒤범벅이 된 얼굴로 새 옷을 입어 보아야 누구 하나 곁에 올 사람도 없고 이러한 이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줄 모르는 사람이며 곁의 사람에게 비웃음만 받을 것이라 하겠다.

신학기가 시작되는 이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다 새롭고 확실하게 되돌아봄으로서 잘못된 일이 많다면 진실로 참회하여서 자신의 삶을 발전 지향시켜 나아가야 하겠다. 그렇지 아니한다면 결국 똑같은 생활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기를 발견할 것이고 그것은 누구도 책임질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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