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관찰
이법산 스님 / 정각원장

봄은 희망의 계절이다. 만물이 소생하며 새로운 세상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진실로 무상의 이치를 알고 보면 찰나찰나에 새로움을 맛보며 진취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생멸(生滅)에는 일기생멸(一期生滅)과 찰나생멸(刹那生滅)이 있다. 예를 들면, 일기생멸은 사람이 이 세상에 생겨나서 죽어 없어질 때까지라고 한다면, 찰나생멸은 우리 몸에 있는 세포가 찰나찰나에 생멸을 거듭하며 변화를 일으키고, 마음에 생각이 찰나찰나에 일어나고 변화하며 바뀌면서 한 생명이 나고 죽는 찰나가 더 긴 생명의 세계로 새롭게 변신하며 영원의 세계로 이어져 가고 있다.

이와 같이 생멸상은 어떤 일정한 시작에서 끝남에 이르는 존재적 생명을 의미한다. 세상은 찰나의 연속에서 무한한 변화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특히, 인간은 마음이 조급하여 잠시도 멈춰있기를 싫어하여 이른바 개혁이라는 인위적 변화를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개혁이 자신의 환골탈태(換骨奪胎)로 스스로 태어남이 진정한 개혁인줄 모르고, 남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고, 남을 못살게 하여 자기의 영달을 영위하자는 소아적(小我的) 방향으로 실행된다면 개선이 아닌 개악이 되어버릴 수 있다.

어쨌든 이 사회는 어떤 부류의 사회이건 변화를 염원하고 있고, 또 변화를 통해서 만이 새로운 성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개혁이든 개선이든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 가운데 인간만이 자기개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인간이 개혁을 주도할 수는 있으나 우주자연의 생멸하고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자연에 순응해야지, 이를 거역하고는 어떤 존재적 변화로 자연의 순행을 역행시킬 수는 없다. 반드시 인과(因果)의 응보(應報)가 따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을 통한 수행으로 자기 개혁을 권하셨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고 함은 자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먼저 자기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현실적 가치를 직감하고, 자기의 올바른 변신으로 사회적 현실을 자타가 공감하고 공생공존하는 진실한 현상으로 향상하게 하는 것이 자각각타(自覺覺他)·각행원만(覺行圓滿)의 대승사상이다.

불교의 중도(中道)라는 의미는 치우친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중도가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라고 하겠으나, 동시에 이것 아닌 것도 아니며 저것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밝고 맑은 본심(本心)에서의 진실한 판단으로 절대적 긍정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보적경(寶積經)』 「가섭품(迦葉品)」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중도, 즉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란 물질(色)에 대해서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 않다고 보는 관찰이다. 이와 같이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지작용(行)과 인식(識)에 대해서도 영원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이 중도이고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다.

어떤 존재를 가지고 영원한 것이라거나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쪽에 치우친 극단론이다. 이 영원과 무상 사이의 올바른 것은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으며,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될 수도 없으며,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중도 즉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다.

 

어떤 현상적 존재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 타당성을 가지고 모두 공감하며 조금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판단으로 인식하고 존재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이 새로운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개혁을 요구하고 변화를 부르짖는 사회 속에서, 적어도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더군다나 부처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동국의 광장에서는 현상의 존재적 가치를 면밀히 검토하여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성 있는 변화로 개선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떤 기득권자의 권위와 독자성에 의하여 방향을 무리하게 선회한다면 구성원의 또 다른 소외감으로 화합의 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일기(一期)와 찰나(刹那)가 시간적 존재라면 단체와 개성(個性)은 공간적 존재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독불장군은 불행을 초래할 따름이다. 모든 사람의 ‘나’라는 개성이 존중되면서, 어느 누구의 인권도 무시되지 않으면서 공동체의 완전한 화합의 틀이 역동적으로 활동할 때 시공(時空)의 초점에서 무한한 미래의 발전적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한 시점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미래의 시간은 무한하고 공간 역시 활짝 열려 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고 공간도 놀고 있는 내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열어 가는 개척정신이다. 고려시대 진각국사께서 “깨달음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막연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는 망하는 자이다. 고여있는 물은 반드시 썩는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화석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참고는 될지언정 되돌려 살려낼 수는 없다.

과거의 틀에서 빨리 벗어나 열린 미래를 향하여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적절히 활용하는 현실 직감적 감각으로 현상의 존재를 진실로 관찰하고, 사심(私心)없는 무아(無我)의 대도를 함께 용맹정진 한다면 동국의 미래는 아침 햇살처럼 밝게 빛날 것이다. 그리고 필자 역시 간절히 기도하고 축원하는 바이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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