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지킴이, 환경 불교
이경희/ 충북대학교 철학과 강사

오늘날 우리는 기상이변, 생태계 파괴 등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물론 지구 전체가 멸망할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환경파괴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관한 많은 수의 환경론들을 쏟아내게 하였다. 우리가 다양한 환경론들을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분류하자면 크게 두 가지이다. 물론 이 둘은 결코 서로 독립된 원인들이 아니다.

첫째,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식에 원인이 있다. 인간은 동물이나 자연과 달리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할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인간과 동물은 전혀 다른 존재이며 그것들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인 것이다. 이런 점을 聖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물에 대한 어떠한 대우도 도덕적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강변하였다. 물론 이러한 비판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어느 누구도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육식을 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에 가둬놓고, 좋은 육질을 찾음으로써 전혀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어쩌면 가축들은 도살장을 안락사의 장소, 고통으로부터 해방으로 느낄 지도 모른다. 또한 단순한 편의나 관광지 개발을 위해 산림지역 등의 무분별한 도로 확·포장을 초래한다. 도로건설은 도시의 열섬현상을 초래하고 지구 온난화를 부추겨 환경파괴의 원인이 된다. 사실상 문제는 이러한 환경파괴 행위에 참여하면서도 우리는 전혀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바로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인간과 전혀 무관하다고 믿는 뿌리깊은 무지 때문이다. 자연은 피라밋 형태의 먹이사슬 구조가 아니라 원형의 생태학적 순환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물과 같은 자연환경의 오염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식물의 변종과 멸종을 일으키고, 그것을 먹이로 하는 초식동물과 그 뒤의 육식동물과 인간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결국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에 의해 조절·유지되는 지구전체의 파괴를 부를 것이다. 모든 존재들은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결국 불교의 지혜인 연기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과 다른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반대로 인간과 다른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곧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일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보호는 연기법이라는 지혜와 상통할 뿐만 아니라 자비심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자연을 물질로만 보고 도덕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곧 생명을 죽이는 부도덕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적 환경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고용주나 노동자 모두를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킨다. 과거 함께 일하고 소비했던 공동체 사회의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만족을 얻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노동은 고용주에게는 비용으로 노동자에게는 자신의 여가와 즐거움을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노동은 달갑지 않은 것으로 가치가 왜곡되었다. 이 사회의 경제논리가 적정규모의 생산으로 소비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활동의 유일한 목적은 소비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많이 소비하는 것을 능력과 덕목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을 느낀다. 이와 같은 잘못된 허위의식에 의해 조장된 소비는 더 큰 소비를 부르고, 결국 불필요한 잉여 생산으로 자원의 고갈과 환경파괴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생산과 소비가 일치했던 시대, 즉 노동이 곧 즐거움이었던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그것은 결국 불교가 표방하는 경제논리가 아니겠는가. E.F.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저서에서 불교의 노동을 3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시키는 場을 부여하는 것이고 둘째,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자기 중심적 태도를 버리도록 하는 것이며 셋째, 정상적인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불교 관점에서 보자면, 노동은 소비를 위한 생산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속의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창조활동으로서 그 자체로 즐거움이며 목적이다. 따라서 인생에 대한 만족을 위해 우리는 왜곡된 소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보다 많은 소비를 위해 많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낼 일도 없다. 한정된 자원 속에서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은 도둑질이다.

불교의 두 번째 계율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행위는 모두 이 계율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원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단지 허위의식의 충족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재화를 쌓아두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키고, 결국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용할 수 없게 강탈하는 행위이다. 더욱이 과도한 부의 축적은 낭비와 과소비를 부추겨 많은 것들을 쓰레기로 버리게 만든다. 그것은 환경파괴를 불러 다른 존재들의 파괴와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단지 경제적인 활동만도 아니며 미덕도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문제와도 연관되며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만난 The Earth Sangha(http://www.earthsangha.org)라는 불교 환경 단체는 이러한 환경론과 불교를 매우 뛰어나게 접목한 사이트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불교이론과 환경론이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보게 되며, 환경론이 주장하는 의식개혁과 사회개혁에 불교수행이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덧붙여 이곳에서 우리는 이들의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州)의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발원하여 대서양의 체서피크만(灣)으로 흘러드는 총 길이 462km의 포토맥 강 유역의 자연환경보호 프로그램(The Potomac Native Forests Project)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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