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수행
김재성/ 천안 위빠사나 수행처 호두마을 지도법사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 수행법이 무엇인가 바르게 파악하고, 그 수행법을 실천한 결과에 대해서 되돌아보아,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 좋은 수행법을 스스로 찾을 때에만 우리의 삶은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기에 이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으로 삶의 향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지난 호(74호)에서 던진 위의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정리해본다.

먼저 불교 수행의 이익 또는 목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인 열반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苦와 苦의 滅만을 설한다고 하신 붓다의 말씀은 인간 존재의 현실적인 모습을 바로 보고, 그 상태를 극복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포함한 불교의 모든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가장 중요시되는 초기경전의 하나인 『대념처경』에 보이는 수행의 이익은 다음 일곱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1)마음의 청정 - 번뇌의 제거, (2)슬픔과 근심의 극복, (3)비탄의 극복, (4)육체적인 고통의 극복, (5)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6)네 가지의 道와 果의 성취, (7)열반의 성취.

여기의 일곱 가지 이익 가운데 마지막 열반의 성취가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익을 얻는 데는 길게는 7년 내지는 짧게는 7일이 걸린다고 경전의 말미에 제시되어 있으며, 번뇌가 남아있으면 不還의 깨달음을, 번뇌가 없으면 아라한의 완전한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위빠사나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팔리어로 vipassana, 산스크리트어로 vipasyana라는 말은 영어로는 inward vision, insight, intuition, introspection (PTS: Pali English Dictionary p.627)으로 번역되는 말이며, 가장 일반적으로 insight 또는 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의 어원을 보면, 접두사 vi에 ‘보다’라는 뜻을 지닌 passati라는 말의 명사형인 passana로 되어 있다. vi라는 접두사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vipassana에서의 vi는 뛰어나다(visesa)는 의미와 다양성(vividha)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뛰어난 봄, 뛰어난 관찰, 통찰 등이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뛰어난 관찰이라고 할 때는, 일반적인 관찰이 아니라 현상의 본성을 꿰뚫어 본다는 의미이며, 영어의 insight라는 번역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이라고 할 때의 여러 가지 방식이란, 無常, 苦, 無我라는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법의 특성(三法印)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이 바로 청정(열반)에 이르는 길임을 설하고 있는 경전으로 법구경(法句經;Dhammapada 277-279)이 있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영원하지 않다(無常)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괴로움(苦)이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법들은 영원한 자아가 없다(無我)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에서 지혜에 의해 본다는 말(pannaya passati)이 다름 아닌 위빠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을 좋거나 싫다는 감정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끊어짐 없는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내면의 적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이라는 근본번뇌를 끊어 낼 수 있게 된다. 이 번뇌들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을 바로 관찰한다면 끊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집중된 마음으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포착하고, 날카로운 관찰의 힘으로 끊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관찰은 생각이나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기민한 마음의 작용인 것이다. 이러한 관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진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대상에 일대일로 직면하는 마음의 작용인 마음챙김(念, sati)이 있어야 하고, 마음집중(定, samadhi)이 있어야 한다. 팔정도에서 선정의 그룹에 속하는 세 가지 덕목이 갖추어 질 때 올바른 지혜가 생긴다는 의미이다.

수행은 실제로 해볼 때 그 맛을 알 수 있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아도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나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기는 어렵다. 이론적인 지식은 살아있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순간이라고 깨어있는 수행을 하여 욕망과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욕망과 분노가 끊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마음은 깨끗해져서 평온함과 지혜가 자리할 것이다. 수행은 이렇게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마음의 평온과 날카로운 지혜,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자애로움이 위빠사나 수행과 함께 길러질 때,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