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상적 인간관
안성두 / 불교대학 강사

우리는 소위 시장자본주의라고 하는 시대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가치의 기준이 시장이란 신에 의해 주어진다고 믿는 시대 속에서, 동양의 전통 종교가 제시했던 욕망의 억제, 자신의 내면적 정신적 완성과 이를 위한 수행, 타인에 대한 배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일체감 등의 고귀한 덕목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욕망을 억제하는 대신에 이를 극대화시킴이, 내적 성취보다는 외적 부풀리기가,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허용되는 한 자신의 이익만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는 자세가, 일체 중생의 평등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悲心 보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적인 삶의 방식이 ‘인간의 얼굴’이 없는 자본주의 윤리의 내적 본질인 듯하다.

물론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이러한 비관적 전망은 전통적 삶의 기준이 근저에서부터 붕괴된 우리 사회에서 더 비극적 형태로 나타나는 듯하고, 실제 이런 전통적 가치의 붕괴는 시장지상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식 깊숙이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침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라는 올림픽의 구호처럼, 모든 이들은 자기에 맞는 ‘적절함’ 보다는 모든 면에서 남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높이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적 삶의 방식이 생활을 물질적으로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점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는 과연 그것이 우리의 삶 자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전에 비해 모든 면에서 물질적 상태는 나아진 듯이 보이고 사회적 시설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에 비례하여 사람들이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교적 인간상의 전형

삶의 목적이 진실로 행복해지는데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이를 충족시키려는 자본주의적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이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욕망이란 마치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독과 같아 결코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무엇을 소유하고(取), 이를 통해 그것을 지배하려는 심리적 지배욕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불교는 인간이 ‘소유’를 통해서는 절대로 내적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사태는 “무상한 것이며, 무상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을 자아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불자들에게 있어 어떤 삶이 이상적 삶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일까? 우리는 실생활 속에서 성철스님과 법정스님, 그리고 법륜스님과 같은 선지식들을 만나게 된다. 세 분을 특정해서 거론한 이유는 세 분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도를 삶 속에서 실현하셨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아직까지 세 분을 친견할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게 수행하시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뵙고 들을 때 진실로 위안을 얻게 된다. 인생에서 자신의 삶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주는가!

하지만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경전의 기술에 국한시켜 볼 때, 우리는 여러 유형의 이상적 인간상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불자에게 있어 세존이야말로 모범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세존의 경지가 너무 지극한 경지이기에 일상인에게 모방 내지 학습 가능한 이상적 인간의 유형이 흔히 ‘삼승(三乘)’이라고 불려지는 성문과 연각, 그리고 보살일 것이다. 이들은 각각의 독특한 수행법으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부과된 선입견에서 벗어나 이들을 평가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초기불교의 인간상

초기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은 아라한이라고 불리는 성자이다. 석가모니불을 친견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초기불교의 수행자들은 세존의 위대함에 감화되어 그의 경지는 천인은 물론 수행도의 최고의 단계에 이른 성자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붓다 대신에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아라한이란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應供)’ 또는 ‘적(=번뇌)을 죽인 자’라는 의미로서, 번뇌가 끊어져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성자를 말한다. 승가의 성립과 더불어 4성제와 연기 등의 교설이 확립되었고 이들 교설을 선정 속에서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학습함에 의해 해탈도를 성취하려는 것이 성문적 전통이었다. 그들은 승가 내에서 정주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감관의 억제, 지계의 준수, 선정의 수행과 5온의 관찰을 통해 윤회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자유를 체득한 수행자였다.

또 다른 초기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수행을 했던 ‘독각(獨覺)’ 또는 ‘연각(緣覺)’이라고 불리는 성자들이 있다. 그들은 연기의 도리를 누구의 가르침에 의존함이 없이 홀로 자신의 사유에 의해 깨우침으로써 붓다가 되었다고 한다. 선입견 없이 말한다면 그들은 불교승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수행자 전통을 반영하고 있고, 또 초기경전에 있어서 그들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었다고 보인다. 승가의 성립 이후 그들의 ‘비사회적’ 엄격한 고행주의적 행동방식은 대다수 승가의 구성원들에 의해 지지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런 엄격한 수행주의 전통이 불교 내부에서 다시금 일깨워져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소위 ‘유가사(瑜伽師)’라고 불렸던 불교요가행자(yogacara)들의 수행도 이와 관련해서 주목된다. 그들의 견해는 설일체유부의 논서인 <대비바사론>에서 종종 인용되고 있고, 그들은 철학적 불교에 대한 일종의 수행중심적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들은 주로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아란야에서 궁극적 실재성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했는데, 이러한 전통이 홀로 진실재를 인식하려고 했던 연각수행의 전통과 정신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대승불교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은 이타적 존재로서의 ‘보살’의 이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보살은 재가보살도 있고 출가보살도 있어 실로 모든 4부 대중이 그 속에 포섭될 수 있는 통합개념처럼 보인다. 형식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보살사상은 당시의 제 사상을 포섭하면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이란종교의 영향 하에서 천상적 구제자로서의 보살관념이 대승불교에 도입되어 아미타불, 미륵보살, 관세음보살 등의 위대한 구원력을 가진 보살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본생담> 등의 불전문학에서 석가모니불의 전생을 보살로서 기술하는 경향과 결합되어 자기구제 대신에 중생구제를 위해 온갖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이타적 존재로서의 보살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보살의 이타성은 모든 중생을 자신의 유일한 갓난 아들처럼 보라는 수행상의 방법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의 해탈을 기꺼이 연기하는 이념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극단적 형태의 이타성(利他性)은 제법의 무자성(無自性), 공을 전제해서만 유연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 구제하는 자와 구제받는 자 등의 모든 종류의 대립성을 넘어서 있는 순수행위 자체로서의 보살행은 이런 공성에 주하기에 그는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과제인 중생구제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인간상

앞의 성문과 연각이라는 초기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은 대승불교도에 의해 ‘홀로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자’, ‘자비심이 없는 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대승의 소승에 대한 전통적 가치평가는 분명 대승의 고양된 자기인식과 관련되어 있고, 또 대승의 성립 당시의 시대적 정신적 상황 하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승의 성자들이 자비심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실제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가 와서 법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도 자비롭게 질문자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 가르침을 베풀었다. 다만 포교를 위해 스스로의 내적 평화를 깨트리고자 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지금 이 시대의 문제의식에서 볼 때 우리는 사상적 교리적 문제에 대한 대승불교의 판단에 너무 민감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이해는 필요하지만, 이를 지나치게 교조화해서 파악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문화적 다원주의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실로 어떤 길이든 그것이 자신에게 맞는 길이고 또 여법(如法)한 길이라면 붓다께서 가르친 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금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 세계의 압도적인 물신적 경향에 대항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반대축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수행전통을 제시해 왔던 불교에 의해 주도적으로 형성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전통을 소승 내지 대승으로 우열반 나누듯 편가르기 하는 태도는 실천론에서 더 이상 타당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불교의 여러 전통이 보여주는 다양한 수행론은 각각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물신적 사고의 근저에 있는 갈애나 자아중심적 사고 등을 극복케 하는데 매우 유용한 기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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