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소가 되라 법수 스님 /불교문화대학
강사
제자가
선사에게 묻습니다. “수행하여 깨달아
마친 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하기를
“마을로 내려가 소가 되라.” 또 묻기를
“그럼 아직 깨닫지 못한 수행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하기를 “절집의 소처럼
하여라.”
옛날
불교가 흥했던 시절에는 소를 도살하게
되면 절집으로 데려 와 염불하고 재를
올려주어서, 농경에 힘쓴 노고를 치하하고
왕생극락을 비는 의식을 하곤 하였다.
아무리 병들고 노쇠한 소일망정 죽음을
즐거워 할 짐승은 없다. 그러니 절집의
소란 며칠 후면 죽게 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놓인 비상한 상태를 말함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모름지기 주인을 위해
헌신하고 마지막으로 자기의 육신마저
다른 이를 위해 공양 올리고 곧 떠나야
하는 소처럼, 지금 이 순간 한량없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생사해탈을 위해 목숨마저
초개같이 버리는 심정으로 용맹정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용맹정진으로 생사를 초탈한 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 만 중생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한다. 마을의 소란
중생을 위해 육도만행(六度萬行)하는 보살이다.
나 혼자만의 깨달음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널리 중생회향하는 수행자야
말로 깨달음을 실체화하지 않는 참된 보살행을
실천하는 자 일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보면 “절집의 소”가 되란 말은 상구보리(上求菩提)하라는
것이며, “마을의 소”가 되란 것은 하화중생(下化衆生)하라는
가르침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생사를
여의고 깨달음을 구하라. 그리고 널리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라.” 는 말씀은
대승보살의 실천명제이다. 보살은 지혜로써
생사에 머물지 않고(無住生死), 자비로써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無住涅槃) 무주행(無住行)의
실천자이다. 생사가 본래 공함을 요달하여(了生死本來空),
생사를 그래도 열반(生死卽涅槃)으로 돌려쓰는
사람, 그리하여 생사에 탐착하지 않고,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끊임없이
뭇생명을 이롭게 하는 보현행자 그가 곧
보살이다. 이러한 보살의 모습은 고통의
현실을 떠나 홀로 저 피안에 안주하는
소승 아라한의 모습이 아니며, 세간을
버리고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출세간
제일주의자의 모습도 아니다. 바로 이
시대에 역사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안락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 불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살이며,
보살이어야 한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평상심을 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옛 조사는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그대로가 진리의 장이요, 우리의
평상의 마음 그대로가 도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불교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요,
일상생활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부처님 말씀, 조사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된다. 출가란 물리적 공간인
세속의 집을 떠남이 아니다. 탐욕, 욕망,
집착의 집을 떠남이 진정한 출가이다.
재가란 욕망의 집에 머물러 있음이 아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아서 청정의 집에
머뭄이 진정한 재가의 삶일 것이다.
생활
불교란 생활 가운데서 염불기도나 참선을
몇 시간씩 하는 그런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진정한 생활불교란 생활 즉 “삶 그 자체가
그대로 불교가 되는 것이다.” 나의 일상생활이
따로 있고, 또 종교생활이 따로 있어서
일상과 불교의 가르침이 이원화 되고 괴리되어
있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활불교가
아니다. 즉 불교로 사유하고 불교로 말하고
불교로 행동하여 나의 삶 자체가 그대로
진리(Dharma)와 하나가 되고자할 때 바로
생활불교가 실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생활을 떠나 불교가 존재할 수 없고,
불교를 떠나 나의 생활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생활이 불법이요(生活是佛法),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생활 가운데서
수행하는 참불자의 모습을 만들 수 있을까.
낮추는 마음(下心)과 비우는 마음(空心)이라고
생각한다. 형상이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다이다. 그리고 형상이 없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허공이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가장 낮은
자세로 낮추었기 때문이며, 허공이 허공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웠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가 이룰 수 없으며, 허공이 욕심과
집착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다면 허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낮추고 낮추어 바다가
되고, 비우고 비워서 허공이 되면”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이루고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의 법신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낮은 바다가
생명의 원천이 되고, 텅 빈 허공이 생명을
키우나니, “나를 낮추어 남을 공경하고
나를 비워 너를 채우는 것이 지혜요 사랑이다.”
사랑과 지혜로 살아가는 불자가 곧 생활이
불법임을 증명하는 사람이며, 평상심이
도임을 실천하는 보살이다.
보살행의
실천이 없는 불교는 살아 숨쉬는 생명불교가
아니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새로운 불교가 정녕 창조적 생명불교일
것이다. 우리 모두 바다 같이 낮추고 낮추어
원융한 평등심을 갖추고, 허공같이 비우고
비워 텅 빈 충만으로 생의 물결을 출렁이자.
불교가 온전히 생활이 되는 수행자가 되어,
낮은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이웃과 모든
생명의 안락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하여
이 시대 이 땅에 보현행원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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