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대산 문수 성지를 찾아서<2>
이도업 스님/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화엄경에서 신앙의 대상은 문수보살이다. 그렇다면 문수보살이 계시는 곳은 어디일까? 화엄경 「보살주처품」에서는 그곳을 동북방(東北方)에 있는 청량산(淸凉山)과 진단국(震旦國)에 있는 나라연산(那羅延山)이라고 전한다. 문수보살은 이 산에서 1만의 보살들을 거느리고 계시면서 항상 法을 설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북방의 청량산과 진단국의 나라연산은 지금 현재 어디에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일까?

법장(643-712) 스님은 『탐현기』에서, 청량산은 현재 중국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五臺山)이고, 진단국이란 진단(眞旦) 혹은 지나(支那)국이라고도 하는데 한나라(漢國)를 말하고, 나라연산은 견노산(堅牢山)이라고도 하는데 靑州 경계에 있는 동노산(東牢山)을 말한다고 했다.

인도에서 설해진 화엄경 「보살주처품」에서는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로써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과 “진단국에 있는 나라연산”을 들고 있는데, 법장이 청량산은 현재 중국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이고, “나라연산은 청주 경계에 있는 동노산”이라고 주장한 것은 대단한 논리의 비약으로 생각된다.

도선 스님은 『집신주삼보감통록』에서, 오대산은 여름에도 지극히 시원해서 청량산이라고 하는데, 4방이 300리에 이르는 웅장한 산이며, 얼마나 높은지 정상에는 풀도 자라지 않으며 오직 골짜기에만 소나무들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오대 중에서 중대가 가장 높은데 거기에는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이 있다. 맑기가 거울과 같아서 개인 날에는 주위의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답게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곳곳에 불상과 문수보살상이 있는데, 그 주위에는 하루 종일 종소리가 끊이지 않고 향기가 가득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 자장 스님께서도 이 태화지에 가서 기도를 한 후 문수보살로부터,

 

了知一切法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을 깨달아 보니

自性無所有   자성(실체)이 있음이 없다

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을 이해하면

則見盧舍那   곧 비로자나 부처를 보리라

 

라는 4구의 게송을 받고 돌아와 한국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산을 오대산이라 이름하고 그곳을 문수보살 상주처인 문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청량 징관(738-839)은 『화엄경소』에서 『보장다라니경』을 인용하면서 오대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한 후, 이 오대산에는 수많은 문수보살 영험 얘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이곳에 와서 그 기록들을 보고 확인할 때마다 감응이 마음에 가득했다고 한다.

청량스님의 말대로 중국의 오대산은 그 후 일명 청량산으로 불리면서 문수보살 영험 도량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필자는 작년 7월에 그곳 오대산을 갔었는데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산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금년 6월 27일날 우리 불교문화대학원생들과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북경의 날씨는 아주 맑고 기온은 30도를 넘고 있었는데 오후 5시경 오대산 중턱에 올랐을 때, 갑자기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이곳을 찾아온 목적중의 하나는 자장 스님께서 기도하신 후 4구의 게송을 문수보살로부터 받았다는 그 태화 연못의 모습을 확인해 보고자 함이었는데 작년에 이어 또 비가 오다니‥‥‥.

차안에서 내가 제안을 했다. “오늘밤 자기 전에 각자 문수보살 기도를 합시다. 내일 아침 청량일(淸凉日)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어쩌면 그렇게 맑은 날일 수가 있을까? 기온은 19도 정도! 산행에 얼마나 좋은 날인가. 중대 정상에 오르니 북대와 중대 사이에 태화지(太和池)가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태화지라 부르지 않고 조욕지(圍浴池) 즉, 문수보살이 목욕했던 연못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화엄行者로써 이곳 중대에 와서 태화지를 볼 수 있었고,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볼 수 있다는 한낮의 햇무리 무지개까지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다.

한국 오대산에는 문수 동자와 세조 임금과의 영험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이곳 오대산에도 수없이 많은 문수보살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 「무착화상 반야사에 들어가다」라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광청량전』에 보면,

 

무착 화상이 767년 정월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오대산으로 출발했는데 5월에야 오대산 금강굴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날도 오월의 녹음은 울창한데 문수보살을 찾지 못하고 해질 무렵까지 헤매다가 멍하니 금강굴 앞에 앉아 있는데, 나무를 한 짐 가득 지고 소를 몰고 오는 한 영감을 만나게 되었다.

반야사에 살고 있다는 영감을 따라가 하루 저녁을 쉬고자 했다.

영감:어디서 오시었습니까? 그 곳 불법은 如何하며, 대중스님은 얼마나 계십니까?

무착:남방에서 왔오. 내가 있는 남방은 말세 중생들이 그저 계율을 지키며 살고 있고, 대중은 많을 때는 500명 정도, 적을 때는 한 300명 정도 되지요.

잠시 대화가 끊어진 후 무착이 묻기를,

무착:영감! 이 곳의 불법은 어떠하오?

영감:龍과 蛇가 엉켜 있고, 범부와 성인이 같이 살고 있지요.

무착: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영감: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요.

대선사 무착은 이 소리에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그러자,

영감:이 소식을 모르는 자는 이 반야사에 재울 수가 없소.

그때 그 절에 군제(君提)라는 동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영감:군제야, 손님 가신다니 모셔다 드려라.

천하의 무착 선사가 영감과의 문답에 말문이 막혀 쫓겨나다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시자에게 묻기를,

무착:얘야, 전삼삼, 후삼삼이 무슨 뜻이냐?

동자:억!(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이게 몇 근이요?

했다. 또다시 말문이 막혀 앞이 깜깜해진 무착. 我相에 젖어 있던 무착은 그때서야 아만을 내려놓고 동자에게 절을 하니,

동 자:面上無瞋 供養具요 (얼굴에 성냄이 없음이 참 공양이요)

        口裏無瞋 吐妙香이라 (입안에 성냄이 없음이 묘한 향이며)

        心裏無瞋 是眞寶요 (마음속에 성냄이 없음이 참 보배요)

        無染無着 是眞如이라. (물들지 않고 집착함이 없는 것이 참 진리니라)

그 말을 들은 무착이 감격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반야사도, 영감도, 동자도 간데 없고, 해지는 저녁 노을에 5월의 녹음만 무성하더란다.

 

영감이나 동자는 이 모두가 문수보살의 화현이었던 것이다. 下心한 무착선사는 오대산 너머 문수사로 갔다. 지금은 이 절 이름이 보살정사로 되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오대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절이 현통사인데, 唐나라때 이 절의 원래 이름은 대화엄사였다.

보살정사에 가서 공양주를 시작한 무착은 12월 8일 성도재일에 무차(無遮) 재회의 팥죽을 끓이다가 대오했다고 한다. 그때 팥죽을 끓이던 큰 가마솥(大鼎)이 지금도 남아 있다.

보살정사에 가시는 분은 꼭 한번 확인해 보기 바란다. 3개의 큰 솥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것은 明代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가마솥이 만들어진 것은 600여 년 전인 명나라 때이지만, 그 스토리의 모티브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성립된 오대산 문수보살 영험 얘기에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광청량전』에는 또  「문수보살이 가난한 여인으로 화현해서 나타났다」라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내용은

 

이 절에서는 매년 12월 8일마다 무차대재를 열어 팥죽 공양을 했다고 한다. 6가마니의 팥죽을 끓여 첫째는 부처님께 그 다음에는 국왕에게, 선조 대대 조상님께, 스님들께, 선남 선녀들에게, 천민 거지들에게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팥죽 공양을 하는데 하루는 남루한 여인이 나타나 죽을 청했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난 여인은 또 한 그릇을 청했다. 한 사람 몫을 받았으면 됐지 왜 또 달라느냐는 主僧의 말에 “어찌 사람만 먹을 수 있소. 이 강아지도 먹여야지요.”했다.

차별 없이 공양하는 무차 대회이니 어쩔 수 없이 또 한 그릇을 주니, 잠시 후 또 한 그릇을 청했다. 화가 난 主僧이

 “다른 사람들은 무엇인가 공양물을 가지고 오는데 빈손으로 와서 왜이리 달라는 게 많소.” 하고 나무라니, “예, 저는 가진 것이라고는 이 머리털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공양으로 올리지요.” 하면서 머리털을 잘라 내놓았다. “그런데 왜 또 한 그릇을 더 달라는 것이요?” 하니, “이 뱃속의 아이도 사람인데 먹여야지요.” 했다. 화가 난 主僧이 거절하고 내쫓으니, “그러면 가지요.” 하면서 땅을 탁 치더니, 강아지로 변한 사자를 타고 문수 보살로 변해서 하늘 높이 날아가더란다. 그 광경을 본 수많은 대중들은 문수보살을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을 통탄해 했다고 한다.

 

그때 그 가난한 여인이 공양 올린 머리털을 모아 탑을 만드니 문수발탑(文殊髮塔)이라 한다. 지금도 탑원사에 3m정도의 문수발탑이 남아있다. 물론 명나라 때 만들어진 탑이긴 하지만 오대산의 문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대산을 참배하는 사람은 꼭 가서 확인해 보면 좋을 것이 있다. 태화연못(太和池)과 금강굴과 큰 가마솥, 그리고 문수발탑이다.

이 곳을 남김없이 둘러보고 확인한 후 6월 28일 북경으로 돌아오는 우리 불교문화대학원 원우들의 가슴에는 문수보살을 향한 신심으로 벅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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