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을
항상 자기와 둘 아니게 보라 대행 큰스님/
한마음 선원장
여러분이
작은 법당에 앉아 계시지만 자세히 아실
것 같으면 우주 한 복판에 앉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복판에 앉아 계신 부처님이
수만 분이라 할지라도 한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개개인이 이렇게
제가끔들 모시고 있는 자불을 주인공이라고
한겁니다.
모두
여러분 개개인이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이
있습니다. 불성을 한번 돌려서 말하면
성불입니다. 우리가 그냥 최초부터, 생명이
생길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보배이기 때문에
그 보배로 인해서 이렇게 움죽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알고
이 법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을 해 보게
되고, 우리가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여덟
가지의 문제를, 팔정도를 가지고 잘 해
나갈 수 있게끔 해 놓으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찾는데 어디에서 찾느냐,
보이지도 않는다. 들리지도 않는다. 잡을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믿고 사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무조건 여러분이 죽지
않고 살아 계시다면 자기한테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살아 있으니까 있다는거.
누가 대신 살아 주는 게 없어요.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의 불성이 있다는 얘기죠.
그래
불성이라고 한다면 높이 보기도 하고 얕게
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높이 보면 자기와
동등하게 동일하게 되지를 않으니까 얕게
보지도 말고 높이 보지도 말고 항상 둘
아니게, 법당에 올라가더라도 부처님과
자기와 둘 아니게 마음도 공심으로 갖고
법도 공법으로 갖고 움죽거리는 것도 공용,
공식으로서 만법을 들이고 내도 걸림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법당에 계신 부처님이 그냥 앉아 계신
줄만 아시죠? 여러분이 공부를 하시면
부처님이 오는 사이도 없고 가는 사이도
없이 오고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신계의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믿고 모든 것을 거기다가 맡기고,
예를 들어서 아주 기묘한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그냥 주인공대로 있는게 아니라
때로는 동자도 되고, 때로는 관세음도
되고, 때로는 지장도 되고, 때로는 지신도
되고, 용신도 되고 별의 별 가지각색으로
화현을 하십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대로
염하고 관하면 화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무 걱정 없이 찾기도 하고
살기도 할 텐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신다
이겁니다. 그걸 못 믿는다는 얘기죠. 자기가
자기를 못 믿으면 이 세상에 누구를 믿겠습니까?
여러분 죽어갈 때 말입니다.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죽습니까? 죽어갈 때 모든 것을 다 놓고
그냥 갑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다 놔야
합니다. 자기 불성에다 다 놔야 바로 둘이
아니게 되는 하나의 일체 성이 됩니다.
불성이 된단 얘기죠. 불, 부처가 된단
얘기죠. 여러분이 자격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격을 다 갖춰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간편하게 말씀드리는 것을 오히려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각자 제 몸을 생각하면 세포 하나의 생명도
그냥 같이 있지 따로 떨어져 있는게 아니죠.
그러니깐 공생이란 얘기죠. 공생이기 때문에
공심으로 돌아가는 거죠. 공심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내가 공체로서 마음 쓰는 거를,
한 생각을 잘 해야 공체로 돌아가죠? 공심으로
돌아가고요. 그래야 옳은 데로, 내가 생각하는
데로가죠? 피도 돌아가고, 모두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으로 우리가 움죽거린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전부 공용이다 이겁니다. 공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믿지 못하고 한 생각 잘못하면
공용이 되지를 않죠. 생각을 잘 해낸다면
공용이 되고요. 그러니깐 말과 행과 모두를,
발 하나 떼 놓는 거까지도 의롭고 부드럽게
잘 해야 된다는 얘기죠.
무조건
정신계의 자기를, 보이지 않고 쥘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지만 진짜로 자기가
자기를 믿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누굴
믿습니까? 수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할지라도
여러분하고 통신이 되질 않아요. 얼른
쉽게 말해서 가정에 전화통 놓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집에 전화를 설치하지
않는다면 전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그런데 전화통을 놓으니까 할 데
있으면 하고 또 올데 있으면 온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는 삶이 없이 죽어서 사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지금 24시간 살면서
동일하게 한가지로만 고정되게 보는 게
없고, 듣는 것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만나는 것도 없으니 뭣이 살았다고
할 수 있으며,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함이 있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도리를 넉넉히 아신다면, 설사 셋방에서
살기 때문에 좁아서 조상들이 오셔도 상을
차릴 수가 없다고 할 수 없죠. 자리가
아무리 요만해도 몇 만분이 와서 앉을
수 있는 거니까요.
이
도리를 깨닫고 하나하나 이렇게, 꼭 무명
줄을 잡고 이 도리를 하나하나 느끼고
체험하면서 나가시면 아주 진짜로 믿게
되죠. 진짜로 나를 믿어야 됩니다. 죽을
때는 다 놓고 죽는 것처럼. 죽을 때는
뭐를 두고 죽는 게 없습니다. 자식들을
5남매를 낳아 놓고서 죽으면서, 아유,
저 어린것들은 어떻게 사나?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옆에 계시다가 ‘그 애들은
그 애들 데로 타고나서 살게 되니까 너는
다 놓고 가거라. 죽을 때까지 그것을 놓지
못하고 가느냐.’ 하시더랍니다. 그러니
모든 게 우리가 따지고 본다면 자기가
불충분하게 과거로부터 해 놓아서 일이
저질러지는 거지 그냥 생기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깐 어떤 일이든 간에 남의 탓할
게 없다. 내가 잘 했든 못했든 내 탓이지
남의 탓이 없다 이겁니다. 이것을 똑바로
배워야 여러 마디 이렇게 말을 하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기 싫죠.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한다고요. 그러나 해도 해도 그게
완전히 자리를 못 잡을 때 힘드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좋습니까. 주인공에 주장자를
착 놓고, 그게 에너지 주장자죠. 착 거기다가
놓고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아프면
의사로 화할 테고, 차를 타고 가다가 그러면
지신이 돼 줄 테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그렇다면 허공신이 돼 줄 거고, 배를 타고
가다가 그러면 용신이 돼 줄 테고, 내가
당하는 데로에 관한다면 그렇게 바꿔주는
겁니다. 바꾸어서 화해 준단 얘깁니다.
그러니깐 묘법이고 공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냥
부처님을 여기도 모셔 놓고, 저기도 모셔
놓고 부처님, 지장보살,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일일이 다 외우고 다니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시대가 이만큼 바뀌었으니까
그것도 아셔야 될 거 아니냐는 그 소리죠.
우리가 내 배에 잔뜩, 이 소리하니깐 생각이
나는군요. 중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한국에는
보물이 뭐냐고 하니까 배를 탁 탁 탁 세
번 두들겼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더 말할
게 없거든. 거기에 다 들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한마디 못하곤 돌아갔단 얘기입니다.
그거와 같이 간단하게 하려니까 이렇게
그냥 뚝뚝 띄어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숨을 쉬고 이렇게 사는 원인이
마셨다가 토해내고 토했다가 마시고 하는
것도, 이세상이 한 생각에 펼쳐지기도
하고 들이마셔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상당히
복잡한 세상이 됐죠. 그러니깐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결정을 짓느냐에
따라 문제가 아주 소소영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두 개개인들이 어떻게 해야
잘될지 모르니까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텐데 하고 그냥 자기가 모르는 거니깐
자기 주인공에다가 맡기는 겁니다.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요. 또 그걸 아는 분들은
자기가 그냥 결정을 지어도 되고요.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법정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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