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랑가바드가
처음으로 개발된 것은 BC 2세기-AD 2세기의
사트바하나 시대이다. 아우랑가바드에서
남쪽으로 56km 떨어진 지점인 파이탄을
수도로 하였던 사트바하나 왕조는 당시
그리스와 로마로 이어지는 통로인 웃자인으로
연결되는 장소로서 이곳을 개발하였다.
그 후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아우랑제브로
인하여 이곳을 아우랑가바드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는 이곳을 1650-1670년에
걸쳐 장악했었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사원으로 가는 여정은
마치 건조한 돌사막을 지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울퉁불퉁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밖의
풍경은 가파른 협곡, 나무가 없는 돌산
그리고 잎이 뾰족한 나무들과 선인장들이다.
이러한 자연환경덕분에 세속과 떨어진
이곳에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찾으려는
수행자들이 열심히 수행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약 29km 떨어진 엘로라의 산마루 아래
34 개의 석굴사원이 “ㄱ” 모양을 형성하며
남북으로 뻗어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넓은
광장을 앞으로 하여 서있는 16번 힌두교
사원과 제일 먼저 마주치는데, 엘로라에서
가장 정교하고 거대한 석굴 사원이다.
엘로라 석굴사원들은 아잔타에 석굴사원들을
조성해왔던 왕조의 세력과 장인들이 7세기
초에 갑자기 엘로라로 그 대상지를
옮김으로써 시작된 장소이다. 하지만 왜
그들이 아잔타 석굴사원들을 방치한 채
갑자기 장소를 바꾸었는지는 아직도 이유가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잔타
석굴사원 내부에 그려진 벽화들은 벽화를
그리기 위하여 돌 벽 위에 쌀겨가루와
돌가루를 반죽하거나 점토를 두텁게 바르고
그 위에 불교와 관련된 그림들을 자연에서
추출한 염료를 사용하여 다람쥐 털로 만든
붓을 이용하여 하나하나 채워나가고, 부처님의
생애를 조각으로 조성하여 불교의 중흥기와
불심을 반영해 주는 반면, 엘로라의 불교
석굴들은 단순한 구조와 장식을 하고있다.
하지만 힌두교사원과 자이나교사원은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여 놀랄 만큼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7세기 초에서 9세기에
걸쳐 조성된 불교석굴들은 1-12번까지
번호가 붙어있는데, 이는 남쪽 끝에서
시작하여 북쪽방향으로 시대 순으로 연결되어
있고, 불교석굴사원들을 이어 10세기 경에
이루어진 13-29번까지 번호가 붙은 힌두교
석굴사원들이 있다. 이 사원들을 이어
11세기에 북쪽 끝에 조성된 자이나교 석굴사원들이
5개가 더 있다.
불교석굴의
1번과 7번은 구조의 단순함이 보여주는
친근함이 인상적이다. 이들 불교석굴가운데
5번은 불교석굴 중 가장 큰 규모를 갖추고
있는데, 실내의 배치를 보아 회의실이나
식당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6번 석굴은
힌두교의 여신 사라스바띠(브라흐마의
아내)라고 생각되는 여신상이 제단의 좌
불상과 함께 조성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10번은
다른 석굴들이 수행자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반면, 유일하게 신전(Chaitya)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석굴 중앙에 위치한 9m 높이의
탑과 탑을 앞에 두고 사자 좌에 앉아 있는
불상은 10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온화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듯 하다.
석굴 내부를
2층으로 만들어서 도탈(Dothal)이라 불렀던
11번 동굴은 원래 3층이었던 것으로, 3층은
19세기 말에야 발견되었다. 12번 석굴은
3층 건물로서 중앙에 좌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인도에서
불교의 중흥기가 점차적으로 쇠퇴하면서
엘로라 석굴사원들의 주인도 불교에서
힌두교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조성된 석굴의
배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개의
힌두교 석굴사원들은 화려하고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여 조성되었기 때문에, 힌두교사원이
이곳 엘로라를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해, 아잔타 석굴사원이
불교적이라고 한다면 엘로라는 다분히
힌두교 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다.
엘로라
석굴사원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곳은 16번이다.
“카일라쉬”라는 시바의 히말라야 거주처가
이름으로 붙은 힌두교사원은 높이 33m,
넓이 47m, 길이 81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인데,
8세기의 라쉬트라쿠다 왕조가 7,000여명의
석공들을 동원하여 150년에 걸쳐 깎아
만든 석굴사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석굴사원이 하나의 바위 덩어리를 깎아
만들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석굴을 바닥에서부터
조성한 것이 아니라 천정에서부터 깎아
내려오며 바닥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힌두교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 나오는
악마 라바나가 그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카일라쉬 산을 들어 올려 파르바티(시바신의
아내)를 놀라게 하는데, 시 바가 한쪽
발로 가볍게 산을 밟음으로써 이를 저지하는
모습은 16번 석굴사원에 조각된 여러 조각들
중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석굴사원 중앙에는
시바 링감을 모셔놓은 신전이 있어 여전히
많은 힌두교 신자들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석굴사원 기둥에
조각된 신상들은 아주 다양하게 힌두교
신화의 내용들을 보여준다. 물론 석굴
안에 조각된 조각품이라 조명 없이는 볼
수 없지만, 조금의 수고비를 내면 그곳에
상주하는 안내인이 친절하게 신상에 얽힌
사연들을 설명해주고 남녀 교합상인 마투라상을
볼 수 있게 천정까지 후레쉬를 비쳐준다.
14번 석굴사원에서는
시바신이 파르바티와 장기를 두는 모습과
악신 마히사를 물리치고 승리의 춤을 추는
조각과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나타난 보아(멧돼지)의
조각상도 볼 수 있다.
15번 석굴사원은
2층 구조물로서 시바신의 영원한 개인용
승용차 난디(소)가 함께 조각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비슈누신은 반은 사자 반은
인간의 몸을 갖고 정의를 위하여 악과
싸우는 나라심하 화신으로 조각되어 있다.
북쪽으로
뻗어나가면서 이어지는 힌두교 석굴사원들
가운데 21번에서는 갠지스강 여신상과
야무나강의 여신상뿐만 아니라 시바와
파르바티의 결혼식 장면을 조각으로도
볼 수 있다.
29번 석굴사원에서는
파괴의 주신으로서 시바신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30번 석굴사원으로부터
시작되는 자이나교의 사원들은 북쪽 끝에
있는데, 여러 면에서 힌두교의 석굴사원들과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자이나교 사원들
나름대로의 섬세한 면들을 지니고 있어
천천히 살펴보면 자이나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32번 석굴사원은
“인드라의 회의실”이라고 불리 우는데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1층에 비하여
2층은 섬세하고 정밀한 작업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식들로 가득 차있는 자이나교
신전이 있다. 이 2층에 모셔진 것은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이다. 자이나교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은 바로 이 32번 석굴사원이다.
연속해서 붙어있는 4개의 석굴사원들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30번
동굴은 16번 석굴사원인 카일라쉬를 모방한
것이지만, 그 규모나 기술에 있어 16번
석굴사원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완공돼지
못한 채로 있다.
엘로라
석굴사원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교 그리고
세계의 여러 종교 체계를 넘어서 그 가치가
높다할 수 있다. 우리 인류에게 문화 유산이란
단지 모습을 갖추고 있는 유형의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형으로, 그것이
정신이 되어 풍부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을 보여주는 것도 건강한 유산중의
하나 일 것이다. 지금은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 했던 수행자들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건조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목적을 향해 치달았던 수행의 장이었던
엘로라석굴들. 석굴사원 폐부 깊숙이 감추고
있는 그 신비와 비밀들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어야 할 문화유산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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