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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

송익균/ 기획처 기획예산팀장

 

오늘도 나는 출근시간에 맞추어 캠퍼스로 들어선다. 정각원에서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와 스님의 우렁차고 정중한 반야심경의 독송을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느덧 나는 이 종소리와 반야심경의 독송을 들으면 가슴 뭉클해지는 감동과 정겨움을 느낀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81년 충북대학교 연초학과 졸업반이었던 나는 서울에서 취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동국대학교 교직원 공개채용시험을 합격하여 1982년 2월 17자로 경주분교(당시)에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하였으니 이제 19년 8개월 째가 되었다. 그 당시에도 취업은 쉽지 않았던 때라 가족들은 무척 기뻐하였고, 나 자신도 나를 동국의 한 가족으로 인연을 맺게 해준 학교측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이렇게 해서 사회생활의 첫 출발지인 동국대학교에 재직하면서 나는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로서 동국대학교는 나에게 직장인 동시에 제2의 모교가 되어 내 삶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었다. 동국대와의 이런 인연은 바로 부처님의 보살핌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입사 당시만 해도 나의 불교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고, 불교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내가 1982년 하계 신규교직원 해인사(홍제암) 수련회를 시작으로 교직원 정기법회에 참여하고 문수회(교직원 신행단체)에 입회하면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중년의 나이를 넘어 2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현재의 내가 존재하기까지 직장인 동국대학교와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었던들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항상 나의 생활터전인 동국대학교와 인연을 맺어준 부처님의 은덕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그 동안 불교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나의 지식과 신행심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느 때에는 법회에 형식적으로만 참여했던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으며, 이런 마음을 항상 반성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비록 나의 신행활동이나 불교에 대한 지식은 보잘 것 없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부처님의 위대한 깨달음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사제·팔정도와 사무량심에 대해 정병조님의 ≪불교입문≫에서 발췌하여 다시 한 번 공부해 보고자 한다.

부처님 최초의 가르침 중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와 여덟 가지 올바른 삶의 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통과 직면한다. 그 고통은 인간의 욕망과 정비례할는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이러한 고통을 여덟 가지로 정리하셨는데 이것이 사제 중의 첫번째인 고제(苦諦:괴로움에 관한 진리)이다. 사성제 중 두번째인 집제(集諦)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이다. 이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인데 이를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의 그릇된 마음의 작용은 고통의 원인이다. 부처님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바로 우리들의 내면에 있다고 가르치신다. 인간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불꽃을 끄지 않는 한 결코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부처님은 강조하셨던 것이다. 세번째는 멸제(滅諦)라 하여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탐·진·치를 극복한 삶을 뜻한다. 그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 것이 네번째의 도제(道諦)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올바른 삶의 길이 있다.

정견(正見):올바른 견해, 정사(正思):올바른 생각, 정어(正語):올바른 말,  정업(正業):올바른 행위, 정명(正命):올바른 생활 수단, 정정진(正精進):올바른 노력, 정념(正念):올바른 기억, 정정(正定):올바른 마음가짐.

이러한 팔정도를 통해서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한 사무량심(四無量心:네 가지의 한량없는 마음)에는 첫째, 자(慈)란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는 것이다. 자비는 결코 물질적인 베풂에 한한 것이 아니며, 부드러운 말씨, 웃는 얼굴도 베푸는 것의 하나이다. 베풀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없는 베풂을 통해서만이 진실한 얻음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 비(悲)는 상대방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일이다. 그런데 다른 이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그 사람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을 것이다.

세번째, 희(喜)란 남의 즐거움을 같이 기뻐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기쁨이란 나누어 가질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누어 가질수록 적어진다. 그런데 우리들은 남을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기 쉽다.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부드러움으로 감싸주고,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한 기개로 다스려야만 한다.

네번째, 사(捨)는 버리는 마음으로 평안한 마음을 뜻한다. 즉, 고락과 희비를 초월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경지이다. 이것은 내가 남보다 잘 나고 더 낫다고 하는 교만한 생각을 버림을 통해서 진실로 위대한 경지가 얻어 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서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정쟁을 벌이고, 지도자들은 자신이 한 말을 자주 바꾸며, 각종 뇌물수수와 같은 부정으로 인해 도덕과 윤리의식을 상실해서 점점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 가정에는 부부, 자식간의 갈등으로 가정의 불화가 증가하고 청소년들의 비행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테러와 분쟁으로 일촉즉발의 위기가 온 세계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종교 전쟁으로까지도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미 40년 전에 이러한 종교 전쟁을 예견하면서 불교만이 이러한 분쟁을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매일 같이 만나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한다면 보다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엮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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