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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본래 밝은 마음에 있는 부처

송석구/총장

 

불교를 믿는 이유가 뭡니까?

이러한 질문에 사실상 불교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사람들은 불교가 1600년 동안 이어오면서 신라 ·고려에 국교가 되어왔고 조선조에는 억불숭유되어 왔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는 불법승 삼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불법승 삼보가 구체적으로 사찰에 있는 부처님,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진리의 세계, 또 그것을 지키는 승가, 우리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삭발염의한 것이 승가다.” 또 “불교는 대자대비한 것이다”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많이 있고, 이렇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면서도 또한 불교에는 인간의 인생을 사는 데 중요한 지표를 줄 수 있는 신묘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지 않느냐 하고 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막상 불교가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우리는 흔히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물론 교리상으로는 무명을 깨쳐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밝은 마음으로 밝은 세상에 태어났는데, 우리의 번뇌망상인 무명이 가득하게 일어났으므로 이 무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없을 무(無)” “밝을 명(明)” 즉 밝음이 없는 세계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은 어느 순간 밝고 맑을 수가 있지만 사람과 대하여서 생겨나는 갈등이 있고, 혼자 있다 하더라도 혼자 생각하는 망상으로 인해서 대립갈등이 일어나고, 그럼 잠을 잘때는 잊어버리고 있나 하지만, 또 꿈을 꾸어서 밝은 것을 어둠으로 만들어 가고 맙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밝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자신은 깨달음 자체이기 때문에 일체 시간 속에 밝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밝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고,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깨달았다가 미혹에 빠졌다가 또 깨달았다 하는 이 자체가 생사윤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사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이야기 할 때 생사를 넘어선다고, 생사를 초월한다고 하면 종교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는 멋드러진 말이지만 “생사를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한 순간 순간에 생사 생멸이 있고 마음세계에 지금 생멸이 항존하고 있습니다. 그 생멸의 기간을 짧게 해야 하는데, 짧으면 짧을수록 번뇌가 길고, 길면 길수록 깨달음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일체 시간 동안 항상 밝음으로 있기 때문에 깨닫고 있습니다.

여러분 태양을 한번 보십시오. 이 가을은 밝은 태양이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고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태풍이 오면 구름에 가려지고 그러면 태양이 안보이고 그럼 구름에 가린 세상이 전부인줄 아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처음에 태어났을 때 태양이 밝으면 이 세상이 밝은 줄 알지만 구름이 가려 어두우면 또 그런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좋은 계절에 어느 지역에 가서 눈도 안오고 비도 안오고 맑은 날씨에만 있다 오면 “야 그 지역은 날씨도 좋고 아주 기가 막히더라”라고 하겠지만, 비 오고 어두운 기간에 갔다면 달라졌을 겁니다. 이 세계를 다니면서도 날씨가 좋으면 그 지역은 좋다,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행기 타고 구름 위로 한번 올라가 보십시오. 어딜가든 태양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태양입니다. 결국 우리 마음이 온갖 것을 만들어 내서 붉다 파랗다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 다는 것은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모든 일을 자기가 접해서 그렇게 이해하고 인정하고 사는 사람들은 고통이 오더라도 즐거움으로 벗어날 수가 있고 어떤 난관이 오더라도 극복할 수가 있지마는, 이 고통이 오면 “아 이 어둠이구나”하고 하늘에 있는 밝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 어둠이 자기 인생의 전부인 줄 알면 극복을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부처님 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아 저 태양이 잠시 마음의 구름에 의해 가려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런 장난을 한 것이라 그 책임은 자기 자신한테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왜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과거 어느 때인가 남한테 부지불각 가운데 나쁜 일을 했고, 그 나쁜 일이 어둠으로 내 번뇌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기 상상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가운데 남을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면 이게 바로 번뇌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가 그렇게 보이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불행을 당하게 되면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즐겁고 표정이 밝은 데 자신만 그런 불행을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사실은 지나가는 그 사람마다 모두 고통에 쌓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고통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순간순간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대립과 갈등을 느끼고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고통이 올 때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을 지금 풀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태양의 밝음을 그대로 볼 수가 있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면 생사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생사를 초월하게 되느냐? 그 이야기는 아주 까마득하고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인데 하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생사 초월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속의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생멸한다는 것이 생사 초월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수없이 생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생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 생사 가운데서 실제 자신이 누군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부처님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한 생각 속에 오욕칠정이 일어났을 때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범부지만 그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그 생각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 보는 자리가 번뇌망상이 무너지는 한순간입니다. 그 원인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또 너무 원인을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져가면 더 번잡한 번뇌가 일어나니까 그 번뇌가 일어났을 때는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르던 대세지보살님을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계속 되뇌어 보면 그 생각이 쉬어지고 태양의 밝음이 돌아옵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그에 따라서 고통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고통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백번 찾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염불과 화두 드는 것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만 생각하게 되면 원래 번뇌망상이 없는 자리에 놓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생사와 생사 초월이 없습니다. 본래 생사가 없는 세계가 불교의 근원입니다. 어떤 번뇌망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자리가 없어야만 없어지는 자리도 없는 것입니다. 일어난 자리를 놔 두고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음과 환생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불교에서는 내생이 없으면 안됩니다. 생사는 일회성이고 존재성을 말하는 것이고 죽음과 환생은 연속성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내생에 무엇이 될지 알게 되고 또 전생에 무엇을 했는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일하고 남을 위해서 잘되게 하는 겁니다. 자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내생에도 좋은 내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내생은 있지만 전생이 없습니다. 불교에는 내생과 전생이 모두 있습니다. 사생결단이라는 말이 불교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사결단이라고 안하고 사생결단이라고 하는 것인데 죽음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과 환생이라는 연속성이 삶의 의미를 좀 더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생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불자입니다. 내생을 잘 믿고 현생에 조화롭게 잘 살도록 하는게 목적입니다. 이 연속성이 희망과 밝음을 주고, 우주의 원리가 됩니다. 이 환생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들이 티벳인들인데 “사자의 서”나 “티벳의 지혜”라는 책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불자들이 잘못 불교를 믿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깨달으면 내생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조금 불교를 공부한 사람은 “난 내생도 없어지고 전생도 없어졌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말로서 초월한 것이지 실제로 초월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았다는 자만으로 좀더 대접받으려 하고 남보다 좋은 위치에 있으려 하는 것은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깨달음으로 가려면 양 같이 순해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거짓이 없이 “난 환생한 사람이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테스트에 의해서 환생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받게 되고 그런 교육을 받게 됩니다.

티벳에서 보면 환생하는 데는 네 가지의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고, 둘째는 죽은 다음이고, 넷째는 환생하기 위해서 고통받는 과정, 그리고 넷째는 환생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불자들이 확실히 이해를 해야 합니다. 환생을 인정할 때, 단순하게 사는 동안 착한 일을 하라는 윤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의 원형적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 환생을 마음을 통해서 극복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 같이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잘 안되면, “당신이 부처입니다”라는 이것 하나만 생각해도 현실이 바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100일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하는 가장 순수한 의미는 모든 사람을 부처같이 생각하고 칭찬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본래 밝은 것입니다.

오늘은 죽음과 환생을 이야기했습니다. 생사는 일회성이고 죽음과 환생은 연속성이고 생성의 세계를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밝은 세상 속에서는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고 일체중생이 모두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힘 있게 열심히 동국대를 이끌어 가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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