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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경권유

전해주 스님 / 불교학과 교수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보면 경책의 비유가 나온다. 삼천대천 세계의 일을 다 담고 있는 큰 경책이 미세한 티끌 속에 갇혀 있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이다. 그때 청정한 천안을 구족하여 지혜가 밝은 사람이 티끌을 깨뜨리고 큰 경책을 꺼내어 중생들에게 이익을 얻게 한다는 비유이다.

얼핏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웃어 넘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세계만한 큰 경권이 보이지도 않는 작은 먼지 속에 들어 있을 수가 있으며, 또 그 먼지를 깨뜨려서 경권을 꺼낼 수 있다고 한 것일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이 사실을 가능한 것으로 인정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조그마한 동그란 시디 롬 속에 그 보다 훨씬 크고 많은 분량의 책 내용이 다 들어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용할 줄 모르면 컴퓨터는 깡통이라는 말처럼 컴퓨터가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으며, 그 시디롬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조그만 눈동자에 남산이나 산하대지가 다 들어오는 것과 같은 신통한 일에 견주어 지기도 한다.

이처럼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가고, 많은 것이 적은 것과 다르지 않은 그러한 경계는 화엄경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신라 의상 스님은 그것을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를 포함하고(一微塵中含十方), 한량없는 겁의 세월이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과 같다(無量遠劫卽一念)고도 한다.

아무튼 미진경권유의 내용은 여래의 지혜가 중생들의 마음속에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에게도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다만 망상과 집착 때문에 아직 활동을 못하고 있을 뿐이니, 만일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온갖 지혜가 곧 앞에 나타나리라고 한다. 미진을 깨고 경권을 펼쳐 이익을 얻게 한다고 함은, 곧 망상 집착 때문에 사용못하던 여래 지혜를 사용할 수 있게 됨을 뜻한다. 그리하여 경에서는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교설하고 있다.

이처럼 경책의 비유는 우리에게 불성이 있다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개인이 곧 바로 부처라는 말씀이다. 미진을 깨뜨려 경권을 펼쳐 이익을 주시는 비유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갖추어진 부처님의 지혜는 한량없는 공덕을 지을 수 있다. 온갖 존재가 생겨나고 없어지는 이치를 잘 알며, 즐거운 과보와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는 인연을 잘 분별해 안다. 여기서 죽고 저기서 태어나는 온갖 인연 법을 잘 알며, 귀하게 되고 천하게 되는 인연 과보를 잘 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 법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들의 착한 마음, 나쁜 마음, 좁은 마음, 넓은 마음, 축생같은 마음, 보살같은 마음 등 갖가지 차별한 마음을 잘 알아서 그들을 모두 편안케 해준다. 그리하여 자신도 안온하고 다른 이들도 안온하게 해주며, 세계를 아름답고 청정하게 하는 미묘한 힘을 발휘하게 한다.  

이처럼 부처님과 같은 지혜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든지 나와 남 모두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사용하지 못하고 괴롭게 만드는 것은 망상과 집착 때문이라고 하니, 그러면 망상 집착은 왜 일어나며,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 것인가? 망상 집착의 근본 원인은 지혜가 없는 무명이다. 그런데 그 무명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무명이 본래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면, 모든 망상과 집착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깨뜨릴 티끌이 본래 없는데, 없는 것인 줄 확연히 알지 못해서 매여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무명 티끌이 본래 없는 것인 줄 깨달으면, 곧 바로 무명 망상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자성이 없어서 환과 같은 줄 안다면 얼마든지 지혜로운 마음을 사용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세간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 마음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사유 분별하면 이와 같고 이와 같이 한량없이 나타난다(如是如是 思惟分別 如是如是 無量顯現)”고 한다. 생각하고 분별하는 대로 현상계가 나타나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재의 선지식인 해탈장자는 부처님을 뵈려하면 마음대로 뵙는다고 한다. 자기 몸이 부처님에게로 가지도 않고 부처님이 자기에게로 오시지도 않지만 언제나 뵙고 싶으면 뵙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다 제 마음으로 인한 것인 줄 알기 때문이며, 마음과 부처가 다 환인 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과 같은 지혜은 얻기 어렵다면 평생을 닦아도 어려울 것이겠지만, 쉽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사용할 수 있다고 하겠다. 단 망상과 집착만 없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망상 집착은 인과법만 확고히 믿으면 없어지게 된다. 모든 존재는 인연따라 생겨서 환과 같은 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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