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에서 위상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수학과 물리학 용어로 쓰이는 외에, 지역·직업·남녀·연령·계급
등의 차이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불교용어라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게되었다. 수행의 단계 또는
경지가 어디에 와있는가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는데(『五敎章』), 갑자기 이 말을 떠올리게
된 까닭은 조금 엉뚱하다.
주차할
때 길이 꼬부라지는 부분에 세우면 다른
차의 통행에 방해가 된다. 그런데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곳에 차를 세우는 사람이
많다. 지하철을 타려는 사람이 문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 내리는 사람과 부딪히는데도
문을 가리고 서는 사람이 많다. 여러 사람이
복도 한복판을 막고 서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두 서있을 곳을 제대로 모르고
잘못된 곳에 서 있는 경우이다. 자기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가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그런 사람들이 자기자신이
누구인가를 성찰할 리는 만무하다. 그들에게
“자기자신을 알라”, “존재의 본질을
알라”, “이 뭐꼬”와 같은 깨우침을
촉구하는 말씀들은 모두 소귀에 경 읽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있을 곳을 모르는
이 중생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수행의
단계를 뜻하는 불교 용어 「위상」을,
본래의 뜻을 넘어서서 보다 광범위하게,
서있는 곳의 다양한 국면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면 어떨까. 자기가 현재 서있는
곳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각자의
좌표에 대한 인식, 즉 각자가 속해 있는
환경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 자체의 본질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려는 서구적인 사유이기보다는,
그 존재가 속해 있는 구조를 이해하고,
존재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존재의 본질에 육박하려는 불교적인 사유에
더 가깝다.
학생은
자기가 전공하고 있는 학문 분야의 지적체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자기가 현재 어느 「위상」에
위치하는지 즉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식함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학문은 시작되고 그
확대의 끝에 학문의 구조가 이해되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위상을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 그 학생은 공부
이외의 분야에서도 많은 성취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의 경우 자기 존재의
본질을 총체적이며 즉각적으로 이해하려기
보다는 우선 자기의 전공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보살행일 것이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기가 놓여져 있는 상황-위상을
인식함으로서 자기와 타인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보살행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위상을 아주 작은
일로부터 인식해 나간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까.
각자의
위상을 인식하는 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본분을 깨닫는 것과 거의 같은 뜻이다.
각자의 分을 아는 것은 그 분의 총화인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로 완성된다.
본분을 알고 그에 맞는 질서규범을 지키는
것을 유교에서는 禮라고 불렀다. 예의
실천은 각자의 위상-본분의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주체적이다. 주어진 조건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전체적인 이해 위에서 적극적이며 본질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불교의 깨달음의
사유와 통한다. 선인들이 그 곳에서 불교와
유교의 합일가능성을 보았었는지 모르겠다(명말의
삼교 합일 운동).
“이
뭣꼬”라고 하는 본질적인 깨달음을, 방편으로,
선정과 계율을 통해서 보다는 먼저 일상의
예절교육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무질서·무책임 현상과
무례함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서 발생하는 사태에
대해서 전혀 책임의식이 없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의 위상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례하다. 위상을
알게 하기 위한 실천이 곧 예절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에 적합한 -많은 현대인이
동의하는- 구체적인 예의범절을 갖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예절의 반복훈련을 처음부터
방기하고 있다. 무례함을 탓하기 전에
지킬만한 예의범절을 새로이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상」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런 일이야말로
불교계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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