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라는
게 음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배열한
악보를 보고 따라 하는 것이라면, 가야금
산조 하나쯤 배워 타는데 몇 달이면 크게
모자라지 않은 터인데도 십 년 이십 년을
해오고 이십 년을 넘어 삼십 년을 바라보며
이 일을 해 왔건만 마음에 흡족한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과 미욱한 탓이
없다 할 수 없으되, 소리라는 게 잡힐
듯 하면서도 아득히 멀고 높은 곳에 숨듯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소리란 무엇인가. 내가 찾는 소리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찌하면 얻을 수 있을까.
고향이
경주이고 보니 불교 문화 유적과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보고 배우며
자랐다. 어려서 피아노를 배우다 가야금으로
전공을 바꾸며 미련이 없었던 연유도 어쩌면
이에 기인할 것이고 전통예술의 깊이를
좀 알게 된 것도 이에 기인할 것이며 불교에
대한 이해의 시작도 이에 기인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우리문화와 불교예술과
전통예술 사이에 놓여있는 상호 연관성을
눈 여겨 보게된 소이(所以;까닭) 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세계를 형상으로 전달하여 감동을 얻게
하는데 예술의 역할을 간과 할 수 없을
것이며 종교가 예술이 기술과 떨어져 승화된
정신성을 획득하는 불가결한 요인임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
가야금은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자란 신라
불교 예술에 대한 이해를 넓게 펴 다시
해석하게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에
넉넉한 호흡을 제공하는 도구이자 반려자이다.
우리나라
전통음악에는 연주시간이 한 시간 즘 되는
긴 곡들이 적지 않은데 이를 제대로 연주하려면
수많은 음들의 움직임을 지탱할 수 있는
정적(靜寂)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음과 음 사이에 여유와 긴장을
동시에 간직할 때 마음에 드는 연주가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여유와 긴장, 고요와
움직임은 불교 경전을 읽을 때 그 이해를
돕기도 한다.
잡다한
지식이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불교에서
가르치듯이 수다한 곡을 스치듯 아는 것
보다 성음(成音)하여 소리 하나 하나가
하나의 음악인양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춘
연후에야 비로소 득음(得音) 했다 말 할
수 있으며 격과 멋이 어우러진 연주가
가능해 질 것이고 내가 종래 이루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득음을
향한 공부가 불교를 알고자 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마음에 새기며 늘
불완전한 삶에 균형과 평정을 찾고자 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