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처럼
아름다움이 없다. 길을 나서다 낯선 사람이
지나가도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들녘에
핀 꽃들을 보게 되어도 마음 한 구석이
상큼하게 된다. 하물며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누가 먼저라 할 겨를 없이 인사가
터져 나온다. 먼 옛날에 헤어졌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더욱 기쁨과 설음이 북받치게
된다. 이처럼 만남은 설레임이고, 싱그러움
풀냄새요, 사람의 숨결인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소스라침이 있는 것이 만남이다.
그
만남의 숱한 종별가운데 어떠한 만남이
소중하고 알뜰한 것일까. 이러한 구별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보통은
같은 심성을 갖고 있지 않은 가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고전을 통하여 성현을 만나거나,
믿음의 세계에서 신불을 만나는 것이 최상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는 성장과정이
혼자였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혼자니,
홀로니, 외톨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맛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어도 외로움이 잠겨
오는 것을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사귈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었는지 그렇다 할 외로움이
없었다. 농촌 들녘으로 소먹이를 나서면
소와도 대화하고, 풀을 베면 풀과도 사귀고,
강물을 보면 강흐름에 나의 그리움을 흘려
보내기도 하고, 높은 산을 보면 산꼭대기
걸려있는 구름을 보고 높은 기상을 새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만남이 나의 가슴속에
가득하였고 또한 그들과 쉼없는 이야기를
하였으니 어쩌 서글픔이나 고독이 있을
수 있었겠나. 어떻게 보면 조숙했는지,
달관은 아닐지라도 좀 지나친 성숙이 앞서갔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의 내면 세계에 타오르는
불빛이 사춘기에 있었다. 그것이 싣달타의
만남이었다. 헤르만헤세가 쓴 싣달타를
어릴 때 구독한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성장기이면서 구도기요,
구도를 하면서 고행하는 길이였다. 헷세의
삶이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는 인생이었다.
그 구도와 고행이 서로 맞물리면서 성스러운
길로 향진하는 노정은 뭔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었고, 소년의 외로움이란 말조차
더더욱 소멸시켜 버린 참으로 기이한 책과의
만남이었다.
그
뒤 싯달타가 누구인가. 고타마는 또 누구인가를
찾아나섰다. 그것은 간단한 해답이 나왔다.
고타마 싯달타는 한 사람이었다. 고타마는
싯달타의 족명이고, 싯달타는 이름이었다.
이 고타마 싯달타가 세계의 성자가 되신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3일
때였다. 그런데 헷세는 한 사람의 표현을
갖고 성과 이름을 달리하여 싣달타는 참다운
고타마를 추구하는 수행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사상이지만 적법한
환치법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고타마는
깨친 부처님이신 전인적 인격체로 보고
싯달타는 미완의 인간 아니면 부조리한
인격으로 다루어 본 것은 헷세가 가진
탁월한 문학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부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모태신앙으로부터
비롯하였다하더라도 그때는 어린 시절이라
철학적 사색적이라고 말 할 수 없더라도
조금 생각 깊게 다가서게 된 것은 헷세의
싯달타를 만나게 된 뒤부터 본격으로 석가모니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기로 덤벼들었다. 그리하여
부산 대각사 학생법회에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 곳에서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게되고
불교를 배워 믿는 방향으로 걸음을 걷게
되었다. 그 때 어느 스님이 설법하시면서
“한 마음으로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그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해야 한다. <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 는 말씀에 가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왠지도 모른다. 그저 뜨거운
불덩이가 온 몸을 태우고 있었다. 나도
이 신명을 다 바쳐 불법을 공부해야 한다.
나는 부처를 만나지 아니하여도 좋다.
몸과 마음을 다해 불교의 참다운 진리로
바르게 공부만 한다면 어떻게 부처님의
법을 펴 보일 수 있는 능력이 나오지 아니할
가 하는 이상한 희망의 불덩이가 나를
확확 태우고 있어도 얼음덩이처럼 가라앉는
순간을 느꼈다.
이것이
씨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1955년 이후부터
나의 삶이 달라져 가고 있음을 느끼기도
하고 보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을 느끼고
본다는 것은 어떤 수행의 차제에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행차가
있을 수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차제계행이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한
목숨을 다 바쳐야만 진리의 본체를 증득할
수 있다는 어릴 때 법문은 지금은 귀명례(歸命禮)로
돌아와 있는가. 돌아와 있지않고 어설프게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다면 오온개공(五蘊皆空)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색이 공이요, 수상행식이
모두 공이라는 그 참뜻은 무엇인가. 물질이나
마음의 의식이 모두 공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공이 무엇인가. 비어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우주가 생성할 때의 그
청정함인가. 살아있음인가. 본래 면목인가.
정말 오온은 때묻지 아니하고 오염되지
아니하고, 변질되지 아니함으로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함을 이제 만나 알게 되었다.
이것을 알아 기뻐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온갖 허망함도 많이 만나고
진실이 허망함이 아니라는 것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지만 그 사실을 만나기는 요즘이다.
심경(心經)을 바르게 만나면 스스로 심경(心境)이
심경(心鏡)이 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많은 대상을 만나고 있다. 만나면
법열이 솟구친다. 이러한 모든 것은 내
외톨이 때 들풀이나 산바람 만나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속에 부처님의
마음 소리가 내재하고 있음을 감지한 나의
만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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