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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를 규정하는 내세관

윤영해 / 불교문화대 불교학과 교수

 


1. 한 번뿐인 죽음

애석하게도, 우리는 단 한 번 밖에 죽을 수 없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는 있을망정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상태로의 전이(轉移)’라고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죽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직 안 죽었던, 혹은 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야 옳다.

이처럼 재경험이 불가능한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이기에, 죽음은 우리에게 최대의 신비다. 우리가 만일 두 번 죽을 수 있다면, 그 첫 번째 죽음을 시도해보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기에 우리에게 그보다 더 신비한 사건은 없다.

2. 계속되는 삶

지금부터 약 200만 년 전에 등장한 인류는 약 10만 년 전까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시체들을 아무 곳에나 그냥 던져 버렸다. 그러나 약 10만 년 전부터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편안한 자세로 땅 속에 정성껏 묻기 시작했다. 매장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남아서 존재하며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내생을 위한 준비행위였던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함께 묻기 시작함으로써 더욱 명백해진다.

한편 지금부터 약 3천년 전부터 2천년 전까지 천여 년 동안 일단의 사람들은 내생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대한 이론을 가장 정교하게 발전시킨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이었고 그 다음은 팔레스타인의 히브리인들이었다.

3. 우주론과 내세관

내세관은 필연적으로 우주론과 관련된다. 죽어서 가는 곳이 어디냐는 물음은 바로 우주론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인들의 내세관을 전승한 기독교인들은 우주는 산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과 죽은 사람들이 태어날 저 세상의 둘로 나뉘며, 저 세상은 지옥과 천당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연옥이라는 개념은 아주 늦게 서력 기원 8세기 이후에 생겨났다.

기독교인은 모든 인간의 존재과정을 죽을 때까지, 죽는 순간부터 부활할 때까지, 부활한 다음의 영원한 삶의 세 단계로 이해한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는데 이 둘은 죽는 즉시 분리되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무덤 속에서 부활할 때를 기다리고, 영혼은 부활하여 재림 예수에게 심판 받을 때까지 연옥에서 속죄하며 기다린다. 예수가 재림할 때 이 연옥의 영과 무덤 속에 있던 육이 결합하여 새로운 부활체로 살아난다. 그리고 천당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를 심판 받는다. 천당에 태어난 자는 영원한 지복을 누리고 지옥에 태어난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천당과 지옥을 심판 받고 난 다음에 또 다른 변화는 더 이상 없다. 천당이든 지옥이든 그곳에서의 삶은 영원히 지속된다.

인도 사람들의 생사관을 계승한 불자들은 태어남과 죽음이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를 믿는다. 불자들은 우주가 천상, 인간, 축생, 수라, 아귀, 지옥의 여섯 세계로 구성된다고 믿는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은 이 여섯 세계 중의 어딘가에 존재하며, 죽고 난 뒤에는 또 다시 이 여섯 세계 중의 어딘가에 태어난다.

천상세계에는 고통은 없고 온갖 즐거움만 있다. 인간세계에는 온갖 고통과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간세계 이하 네 세계에는 즐거움은 없고 고통만 있다. 축생들은 천대(賤待)와 부림을 당하다가 결국은 잡아먹힌다. 아수라들은 온갖 시기와 질투로 얽혀 투쟁만 계속하는 고통을 당한다. 아귀는 굶주림의 고통에서 헤매는 존재들이다. 지옥의 존재들은 온갖 방법으로 죽임의 징벌을 끊임없이 반복 당한다.

그러나 이 여섯 세계에서 겪는 고통이나 즐거움은 어느 것이든 영원한 것은 아니다. 천상 세계의 즐거움이 끝나거나 인간 이하 세계의 고통이 끝나면 다시 인간 세계로 태어난다. 그리고 인간 세계에서 짓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 다시 다른 세계에 태어난다.

4. 윤리관과 내세관

내세에 어디에 태어나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은 윤리적인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 내세는 죽기 전에 행했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 것은 모든 종교가 한결같다.

연옥에 대한 믿음은 예수 당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켜 볼 수 있도록 곧장 오리라던 종말과 심판이 자꾸 연기되면서 등장했다. 지옥의 형벌이 영원한 것임에 비해 연옥의 형벌은 영원하지 않다는 점에서 약간의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연옥은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지옥의 영원한 형벌도 아니고 천당의 즉각적인 환영도 아닌 일시적으로 속죄의 형벌을 받는 곳이다. 아주 선하며 또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즉각 천당에 태어나고, 아주 악하며 또한 믿음도 없는 자들은 즉각 지옥에 태어난다. 연옥에는 세 개의 방이 있는데 반은 틀림없이 선했던 자들이 가는 방, 반은 틀림없이 악했던 자들이 가는 방, 아주 악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악했던 자들이 가는 방이 있다.

여하튼 예수가 재림하여 죽었던 자들을 모두 부활시켜 심판을 내리는 그때, 가장 결정적 기준은 선악보다도 믿음이다. 믿음이 있어 천당으로 구원받고 믿음이 없어 지옥으로 버림받는다. 이런 점 때문에 기독교를 초윤리적 종교라고 한다.

불자들 역시 내세에 어디에 태어나느냐 하는 기준을 우선 윤리적 행위에 둔다. 선한 행위를 한 자들은 천상에 태어나 그 과보로서 즐거움을 누리고 악한 행위를 한 자들은 그 과보로서 인간 이하의 세계에 태어나 고통을 겪는다. 즉, 불교의 내세관은 선악의 업인(業因)에 따르는 윤리적 과보(果報)이다.

초기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여섯 세계 중에서 인간 세계에서만 업을 지을 수 있다. 나머지 다섯 세계에서는 인간세계에서 지은 업을 소비하기만 한다. 즉, 다섯 세계는 인간세계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받기만 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업이란 선악의 의지에 따라 실천하는 윤리적 행위인데 인간만이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 천상세계의 존재들은 인간세계에서 지었던 선업의 결과인 즐거움을 누리느라고 의지를 가지고 다른 업을 지을 생각을 않는다. 인간 아래의 네 세계의 존재들은 인간세계에서 지었던 악업의 결과인 고통을 받느라고 다른 업을 지을 겨를도 없지만, 실제로 이들은 아예 의지를 갖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동물들의 행위는 본능에 따른 행동일 뿐 의지에 따른 행동이 아니다. 의지가 게재되지 않은 행동은 윤리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이나 내세관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의 의지에 따른 윤리적 행동이다.

한편, 천상세계는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세계가 아니다. 기독교와 달리 불자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릴 만큼의 지복을 누리고 나면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육도(六道)의 세계에서 어디든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은 없다. 불교는 이 육도에서 떠나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육도에서 떠도는 삶은 결국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육도는 어느 곳도 궁극적으로는 제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며, 뜻대로 안 된다면 결국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없이 거듭되는 육도의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되태어나는 법이 없는 열반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해탈이다. 열반의 경지에 든다는 것은 더 이상 육도에서 윤회하지 않는 영원한 지복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 역시 열반의 지복을 선행으로써 이룰 수는 없다고 믿는다. 선행은 기껏해야 천상에 태어나 한시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기독교가 믿음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는 반면, 불교는 깨달음으로써 해탈을 이룬다. 선업이라는 윤리적 행위만으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불교 역시 궁극적으로는 초윤리적 종교다.

5. 현세를 규정하는 내세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며 더 이상 아무 것도 계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일은 죽어봐야만 알뿐 살아서는 죽음 이후의 일을 결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에 선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누구든 내생의 일을 ‘사실’로서 확인할 수는 없다. 그 무엇을 사실로서 확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해 믿음으로 결단할 수밖에 없다. 윤회설이든 부활론이든 어느 것도 사실로서 확인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어느 것이든 믿음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믿음으로 선택한 내세관이 사실로서의 현세의 삶을 규정한다는 점이다. 내세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어떤 이들은 현존의 삶을 논하기도 부족한데, 어찌 죽음 뒤의 일을 논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이는 좁은 소견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태도가 현세의 삶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

일전에 만난 한 유럽 신부님에 의하면, 요즘 서구의 젊은이들 중에 윤회설을 믿는 이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징조로 보면 성급한 판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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