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유능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는 특히 언어적 자질이 특출하여 수
개의 외국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던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살았던 세월보다 외국에서
살아온 세월들이 더욱 오래되었기에 말뿐만
아니라 사고조차도 외국어로 하는 것이
수월했다고 한다. 그런데 병마는 가혹하게도
그에게서 모든 능력을 앗아가고 말았다.
대부분의 기억 역시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 누워 긴
꿈을 꾸듯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가 정신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를 간호하던 가족과 친지들은 그가 정신을
찾으면 늘 그랬던 것처럼 외국어로 대화하게
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후 사람들에게 했던 말은
오히려 생소하게 들리기까지 한 우리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갈고 다듬었던 외국어들의
기억은 티끌만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가 했던 우리말 역시 교육을 통해 익히게
되는 고급어가 아닌 어머니의 품 속에서
배운 말들이나 고향 친구들과 교통하는
데 썼던 토속어였던 것이다.
만약
나에게, 네 기억이 깡그리 잊혀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너의 언어가 무엇이냐,
즉 너의 모어(母語) 세 가지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첫째,
어머니라는 말이다. 엄마, 그것은 내가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이 백지
상태의 나에게 가르쳐 주려고 시도했던
말이었음에 틀림없는 말이다. 그 말은,
그렇지만 대상에 대한 즉물적인 언어가
아니라, 근원을 나타내는 추상적 언어일
것이다. 근원에 대한 것은,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먹해지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듯이, 처음의 둥지이며, 한없는
자비와 무한한 희생을 상징한다. 나의
종교관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하나의 생활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삶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 삶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며,
또한 끝없는 열망을 갖는 것이 종교적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달리 신을
믿는 행위가 없더라도 신성한 생활은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에게서
무종교인(無宗敎人)이었던 내가 느낀 바였다.
우리는 삶 속의 타인들의 관계에서 늘
어머니를 닮기를 바라며, 그 한량없는
아량과 진지함을 배우고자 한다. 또한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를 돌이켜 보기도
한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근원과 그것으로부터
걸어 나온 과정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어머니는 나에게 첫째가는 모어가
되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아버지라는 말이다. 아마도 내가
태어났을 때 두 번째로 마주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근원이며 과정이었다면,
아버지는 궁극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종교관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종교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늘 이해하고 해석해
내고 싶었던 세계였음을 사춘기가 지나고
철이 들면서 알게 되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말없이 멀찌감치 물러나 앉은
산처럼 힘겹게 다가가려고 애써도 쉽게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어려운 세계였다.
어머니의 정이 내 뒤를 묶는 팽팽한 끈이라면,
아버지의 정은 내 손이 닿질 않는 막대기라
해도 좋을는지…. 난 항상 그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간극 역시, 아버지의
정이라는 냉랭함 역시 무한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버지의
정은 그 맞춤한 거리로써 표현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삶을
사랑하듯 삶도 날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된 계기가 되었다.
셋째,
그것은 죽음이라는 말이다. 내가 이 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 단어를 끔찍스럽게
사랑해서도 아니고 반대로 끔찍하게 싫어해서도
아니다. 또한 이는 모어도 아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어머니들도 품안의 자식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섣부르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죽음이라는 말이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철인(哲人)이
말했듯이, 인간이 직시(直視)하지 못하는
것은 태양과 이 죽음의 세계이다. 인간이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이 둘뿐이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 말의 본뜻은 인간이
진정 바라보고픈 세계가 찬란히 빛나는
세계와 끝없이 어두운 세계임을 역설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 내 종교관
중에 제일 중요한 하나는 종교가 인간이
직시할 수 없는 밝고 어두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또 다른 눈을 달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주위의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죽음이라는 삶의 통과 의례를 겪을 때,
그들의 두려움을 보면서도 그 세계에 대해서
말해 주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원통했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실체도 없는 무엇에,
인간의 운명에 화를 내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화만 내다가는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두려움에 떨 것이며, 내가 살아오며
가치 있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이제 죽음과 화해하고
싶다. 아마도 그 첫 걸음은 그것을 직시하는
데 있을 것이다.
세
단어, 어머니, 아버지, 죽음. 나는 어머니라는
근원에서 걸어 나와 도달하기 어려운 아버지라는
세계와 삶을 향하고 있다. 그 과정이 고단하고
힘겨우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리고
긴 여정의 끝에서 죽음과 대면할 것이다.
어떤 얼굴로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지는
알 수도 없고 자신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내가 내 삶 속에서 공부하고 싶은 종교가
과연 그런 용기를 가르쳐줄 수 있을지….
그렇게 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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