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의 교훈-불이법문(不二法門)
유마경(維摩經)은
석가모니 당시의 훌륭한 성인 유마거사의
설법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유마거사가
병이 들어 석가가 제자들을 보내 문병을
하면서 유마거사의 도력을 시험한 인터뷰집이다.
유마의 설법은 그대로 석가의 말과 같아서
불교에서는 이 책을 부처님의 설법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 책에서 유마는 자신이
병이 들은 것은 중생이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 불이법문으로서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중생에게 아픔이 남아있는 한 제 아픔
역시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혹시
모든 사람들이 병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제 병도 씻은 듯이 낫겠지요...
비유를 들자면 어떤 부잣집 외아들이 병으로
눕자 그 부모들도 크게 상심한 나머지
덩달아 병으로 눕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외아들의 병이 낫지 않는 한
그 부모의 병도 낫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유마경)
유마는
병을 벗어난다는 것이 분별심을 없애고
순수해지는 상태라고 말한다.
병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일까요? 그것은
내가 있다는 생각과 나의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둘로
분별하는 일을 벗어나는 것입니다(유마경)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이처럼 자기 일이기도 한데
우선 자기 자신부터 해탈해야 남을 구원할수
있다고 말한다.
실지로
세존께서는 스스로 얽매여 있으면서 남을
고삐로부터 풀어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먼저 해탈한 다음 남까지 해탈시켜 주는
일은 도리에 맞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먼저 해탈을 이룬 다음
윤회 가운데 뛰어들어야 비로소 다시 속박당할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유마경)
남의
삶을 자기의 삶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불교의 사상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달마대사로부터 여섯 번째
법을 이어받은 육조 혜능은 중생 제도가
궁극적인 깨달음의 길이라는 설법을 한다.
만약
뒷 세상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매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
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속에
있도다
만약
한 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요(육조단경)
2.
현대영화가 추구하는 불교정신
한
인간의 삶이 개인의 영리추구보다는 다른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목적으로 영위된다면, 그 삶은 숭고하고
위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영화가
단순한 상업적 계산하에서만 기능하지
않고 자기 주변의 삶과 현실의 어두운
부분에 빛과 소리를 줌으로써 정신적 각성을
일으키게 한다면, 그 영화는 분명 위대한
걸작이다. 프랑스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감독
샬리 방담)를 보면, 이 영화가 음악을
소재로 하였지만, 단순히 영화를 보면서
좋은 음악을 듣자는 식의 흔한 음악영화가
아니라, 음악은 단지 도구며 수단일 뿐,
이 영화의 궁극적 주제의식은 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상의 모순, 그리고 그 갈등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이지만
명예로운 그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 지하철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이다. 그의 갈등은
음악사를 통해 일관되는 상류사회 음악과
민중 음악의 갈등이다.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도 겉으로는 천재와
범인의 갈등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모짜르트의 화려하고 귀족적이며
천재적인 음악이 민중의 삶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건 한낱 상류사회의 유희이며
정치권력의 시녀노릇밖에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처럼
이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도
진정한 음악가라면 어떠한 길을 가야 가장
인간적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일단 이
영화대로라면 주인공 예술가는 항간에서
추구하는 부와 명예를 포기한다. 그는
누구에게 자기의 음악을 들려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방황하는데, 지상의 화려한 세계가
아닌 지하철, 어둠 속의 짚시촌, 지하수로를
타고 가면서 지하세계에 사는 소외된 거지,
서민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들려준다.
그의 보시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자기 것을 나눠주는 현대적 의미의
사회사업가적 행동이외에도,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얻고 중생도 제도하는
대승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환멸의 인간, 정신분열의
인간들은 이 세상의 기계적인 질서속에서
이탈되어 참자아를 찾아 방황하는 구도자의
역정을 모방한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나오는 주인공 알콜중독자.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직장에서
해고된 이후 자기 인생이 철저히 망가지는데
마침내 죽으려고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창녀와 마지막
불꽃같은 삶을 살면서 생의 욕망을 깨닫지만
그는 그 순간 죽고 만다. 그에게 삶의
희망을 던져준 창녀는 비유컨대 부처의
화신일 수 있다. 그가 정상적인 생활의
범주에서는 결코 인정하거나 동정하려
하지 않았던 비천한 창녀에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볼수 있었던 것은 어떤 계기때문이었을까?
바로 자신의 소중한 삶의 포기에서 비롯된
그의 깨달음이다. <제 8요일>에
나오는 주인공은 정신박약아를 만나 그의
어머니를 찾아주는 여행을 하면서 결국
공의 진리, 불이법문을 깨닫는다. 정박아의
어머니가 죽은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주인공은 그 정박아를 길에
버릴수 없게 된다. 자신이 너무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 때문에 할 수 없이 껴안고
가게 된 그의 인생의 길. 그는 어느새
바보와 살면서 자기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다. 직장과 아내와 가정을. 대신
그는 새로운 삶을 얻는다. 평소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하찮은 바보와 미치광이와
거지, 가난뱅이들의 삶을. 결국 그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길임을 깨닫는데 그건 현대인의
잃어버린 주변의 삶이며 인류의 출발점이며
남이 아닌 자신의 삶이란 새삼스런 자각이다.
인간은
태어난 곳에 상관없이 본래 평등하다.
다른 측면에서 불이법문을 설법하고 있는
한국영화 <바리케이트>는 나와 남이
왜 같은가에 대한 인종/민족적 시각의
인권영화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잘 살기 때문에 돈 벌러 온
외국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우리는
고용주, 그들은 노동자이고 우린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고 착취한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듯 보리고개와
독일광부/간호사 파견, 중동파견건설,
미국이민 등의 개발독재 시기에 우리가
외국가서 당했던 수모를 깡그리 잊어버린채
우리는 우리, 그들은 여전히 남이다. 우리가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인정하지 않을
때 더 이상 커다란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의
세계엔 미추와 선악이 없는 것이며 아프면
약을 주고 가난하면 먹여줘야 한다. 현대영화가
보여주는 인종/민족의 편견은 진리를 거부하는
가장 구체적인 현대인의 악적 종자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설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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