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연나국(梵衍那國)은
동서로 2,000여 리, 남북으로 300여 리에
이르며 설산(雪山) 가운데 있다. 사람들은
산이나 골짜기를 이용하여 그 지세에 따라
거주하고 있으며, 나라의 대도성(大都城)은
벼랑을 따라 계곡에 걸쳐 있다. 그 길이는
6, 7리이며, 북쪽은 높은 암산(岩山)을
등지고 있다. …
왕성의
동북쪽 산 언덕에 있는 입불(立佛)의 석상은
높이가 140 내지 150척에 이르는데, 금빛이
나며 보석 장식이 반짝이고 있다. 동쪽에는
가람이 있는데, 그 나라의 선왕(先王)이
세운 것이다. 가람의 동쪽에는 유석(鍮石)의
석가불 입상이 있는데, 그 높이가 100여
척이다. 몸의 각 부분을 나누어서 따로
주조하여 합친 것이다. …
이는
당 나라 때 현장(玄斡) 스님이 남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일부이다. 현장(600∼664년) 스님은 산적이
횡행하던 게직국(揭職國, Gachi)에서 600여
리를 더 지나 도화라국(覩貨邏國)의 경계를
넘은 뒤에야 비로소 범연나국에 당도했다.
629년에
길을 떠난 이래, 17년 동안 인도를 비롯한
서역의 110여 개의 나라들을 돌아보고서,
645년 정월 장안(長安)에 입성했던 그의
여행 행로는 무려 5만 리….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범연나, 즉 바미얀(bamiyana)은
그의 긴 여정의 초입부에 등장한다.
7세기경의
바미얀의 불교 정황을 가장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기록으로 꼽히는 『대당서역기』에는,
이제 사막의 한 줌 모래로 변하고 만 바미얀
대석불의 찬란했던 위용도 함께 담겨 있다.
그리고
현장 스님은 불심이 돈독했던 바미얀 사람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성스런
신앙심은 이웃 나라보다 더 깊다. 위로는
3보(寶)로부터 아래로는 백신(百神)에
이르기까지 진심(眞心)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마음을 다 바쳐 공경한다.
그토록
깊은 불심으로 이루어진 가람(伽藍)이
수십 군데에 있었으며, 스님들 또한 수천
명에 달했는데, 그들은 소승(小乘)의 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adin)였다고 전한다.
7세기
당시만 해도 그처럼 융성했던 바미얀 불교의
정화(精華)처럼 대석불은 그 계곡,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천 수백 년, 그 육중한 몸에
깊은 세월이 남긴 멍울들을 드리운 채로.
최근에
탈레반(Taleban)의 만행으로 인해 사라지고
만 바미얀 대석불은 서력 2세기부터 5세기경
사이에 조성되었다. 두 입상(立像) 중
하나는 53미터이며, 다른 것은 36미터에
달한다. 옛부터 대석불(大石佛)로 불렸던
53미터 불상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입불상으로 꼽히는 거불(巨佛)이다.
하지만
바미얀의 대석불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단지 세계 최대 규모의 마애 석불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옛날 바미얀은,
불교 문화사의 최성기를 이루었던 간다라
문화가 싹텄던 곳인 동시에, 그 중심지였다는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볼 때, 바미얀은 힌두쿠시(Hindu
Kush)와 코이바바(Koh-i-baba) 산맥이
가로지른 사이의 계곡에 자리하여, 동서
교역의 십자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흔히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의 심장이며,
바미얀은 아프가니스탄의 심장이라고 하는
말에서도 그 지형적 중요성이 반증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다라 예술의 핵심적인 동인(動因)이
바로 불교였으며, 불교 예술은 간다라
시대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바미얀의 불교 유적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에서
성행했던 부조(浮彫) 양식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다는 바미얀의 석불들은 거대한
사암(砂岩) 벽에 대형 감실을 판 뒤에
입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전체적으로
간다라의 초기 양식이 고스란히 배어 나는
불상의 주변 1,000여 곳에는 찬란한 색채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벽화에 그려진, 꽃을 뿌리는 천신들의
옷자락에서는 하늘의 향기가 금새라도
묻어 날 듯하다는 감회를 전하는 기록들도
이제는 단지 환상 속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일설에서는,
바미얀의 미술 양식이 우리 나라의 불교
미술품에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설명하고,
그 직접적인 예를 거론하기도 한다. 오랜
동안 간다라 문화의 정점에 있었던 바미얀의
영향에서 한반도의 불교 예술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의 탈레반은
왜 대석불을 파괴하고 말았는가? 그들은
물론 불교도가 아니었으며, 이슬람 교의
골수 분자들이었다. 탈레반의 지도자 무함마드
오마르는 불상들이 이슬람 교를 모독한다면서
전부 파괴시켜 버리라고 명령했다. 사실,
8세기경부터 무슬림의 지배 하에 들어간
바미얀 지역의 불교 문화의 수난사는 짧지도
얇지도 않다.
그러나
급기야 탈레반이 대석불을 폭파시켜 없애기로
결정을 내린 뒤에 세계적으로 들끓었던
여론은 개인적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인류
공동의 문화 유산에 대한 가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후회는 언제나 때늦은 것이다.
우리 모두가 보다 더 깊은 애정을, 무도한
탈레반이 대석불을 파괴하겠다고 선포하기
전에 쏟았다면, 어떻게 상황이 변했을까?
더 이상, 제2의 바미얀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찍이
바미얀의 국왕이 무차(無遮) 대회를 열면,
처자(妻子)뿐 아니라 나라의 온갖 진귀한
보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쳤고, 자신의 몸까지도 보시하였다는
옛 시절의 영화는 이제 아랑곳없다.
행여,
사막의 모래 바람에 스민 전설 한 가닥
남아서 찬란하고도 거대했던 부처님을
추억하면 그뿐. 또 한 세월 흐르고 나면
누군들 바미얀의 대불을 기억할 것인가?
현장
스님이 전하는 대로, 1,000척 길이의 와불상(臥佛像)이
있었던 곳에서 동남쪽으로 200여 리에
있던 가람에 보관되어 있었다던 상낙가박사(商諾迦縛裟,
sanakavasa)의 9조 가사(袈裟)! 인도 부법장
제3조인 상낙가박사 대아라한이 적멸을
깨닫고 변제정(邊際定)에 들려고 할 때,
대자 대비의 홍원(弘願)을 일으켜서, 이
가사를 남겨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다하리라.
가르침이 다했을 때, 비로소 이 옷이 썩게
하소서.라고 서원했다.
현장
스님이 그 가사를 보았을 때에는 단지
조금 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정녕 그것이
모두 닳고 해져서 사라진 지 언제였는가?
아직
이 사바 세계의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갈망한다. 상낙가박사의 영물스런 가사를
애타게 그리워한다. 그리고 바미얀 땅에
출현할 또 다른 대석불을 한마음으로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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