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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건축의 특성

김동현/ 미술사학과 교수

 


1. 자연과의 조화

집은 주인을 닮고, 사람은 그 집을 닮아 간다고 한다. 그래서 선조들은 집 한번 짓고 나면 10년 감수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집짓기에 혼과 정성을 쏟아 부었다.

선조들은 집을 짓기 전에 우선 집터를 잘 살피고, 집이 들어 설 주변의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지형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집의 크기, 좌향(坐向), 배치 등을 결정한 후 집짓기를 시작했다. 집을 짓는다고 목수가 달려들어 곧바로 나무를 다듬고 조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단을 만들 때는 진단의식(鎭壇儀式)이 행해지고, 기둥을 세울 때는 입주식(立柱式)이 있고, 도리를 얹을 때는 상량식(上梁式)을 행했다. 그리고 집이 완성되면 큰 고사를 지내 집과 인간이 하나 되기를 기원했다. 이처럼 집을 지으면서 쏟는 정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 이상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집이 들어서 앉은 곳이 자연지세에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품속으로 안기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자연에 대한 숭배정신, 순응정신이 건축이나 각종 구조물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정방형이 아닌 비뚤어진 방형으로 쌓은 고구려의 궁궐 유적인 안악궁 터에서 우리는 그 같은 의식을 본다. 똑바로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나 지형을 변형시키지 않고, 자연 조건에 맞추려 했다. 전체 건물도 중심부는 남북 축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좌우와 후방부는 비대칭으로 배치해 중국적인 맛을 없앤 우리 특유의 궁궐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려의 만월대 궁궐터에서도 이 같은 의식은 그대로 이어진다.

서울의 조선시대 궁궐을 보고 중국에 비해 너무 규모가 작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서울의 도성 안에 자금성 같은 궁궐이 들어서 있다고 상상해 보라. 조선의 궁궐이 얼마나 알맞은 크기인가. 지배자의 권위를 크기로 표현하려던 당시의 전제주의적 의식구조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우선 자연을 생각하고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 규모와 비례에 눈을 돌렸다.

권위적인 궁궐이 이러하였으니 종교 건축물인 사찰, 교육기관인 문묘, 향교, 서원은 물론 사사로운 건물은 말할 것도 없다. 신라시대에서부터 이어진 건축 규모의 규제도 이 같은 의식의 소산으로 도시, 마을의 규모 및 자연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외형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지붕선이다. 우리 나라 건축을 두고 처마 곡선이 아름답다고들 한다. 가히 초가지붕의 지붕 마루선은 예술적이다. 자체로서의 지붕 곡선도 중요하지만 집 뒤의 배경이 되는 산세와 산마루 곡선의 어울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골마을의 초가집 지붕선은 뒷산과 너무나 잘 어울려 인공이면서도 자연물인 듯 하다. 이는 의도적이라기보다 늘 하던 대로 하였으나 결국 자연에 안기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기와 지붕도 재료는 다르지만 가장 눈에 띄는 용마루, 내림마루, 귀마루의 끝선들을 모두 곡선으로 마감했다. 같은 기와지붕이면서도 중국과 일본 건축의 용마루 선이 모두 직선을 이루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용마루 선의 직선과 곡선은 전체 집모양의 형태를 좌우한다. 직선의 용마루 선은 시각적으로 양쪽 끝이 내려앉은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켜 집의 안정감을 깨뜨린다.

우리 조상들은 이 같은 착시 현상을 염두에 두고 양쪽 끝을 조금 올려 건축물의 균형을 잡게 하고 딱딱한 직선을 곡선으로 마감하면서 결과적으로 뒷산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이밖에도 자연을 닮으려는 시도는 집 안 곳곳에서 나타난다.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일부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이 자연석을 초석으로 삼는다. 초석을 덤벙덤벙 놓았다고 덤벙주초석이라 불리는 이 같은 자연석 초석은 기둥을 놓기도 힘들 뿐 아니라 그 높이가 달라 초석 위의 기둥도 길이가 다를 수 밖에 없어 건축 과정에 큰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덤벙주초를 즐겨 썼던 것이다.

왜 잘 다듬은 추석을 쓰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썼을까. 다듬은 초석보다 몇 배의 품이 들고 시공이 어려운 건축방법을 선호했을까.

이러한 덤벙주초 사용도 자연 닮기의 한 표현이다. 초석만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기둥도 휘어진 자연 목재를 그대로 쓴 것을 자주 본다.

이것 역시 인공이면서도 자연에 가깝게 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2. 건물에 부여하는 생명력

집을 짓는 것은 곧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아무리 자연에 순응한다고 해도 결국 자연의 원래 생명력은 손상을 입게 마련이다. 토지가 변형되고 나무가 잘리고 꽃과 풀이 베어질 수밖에 없다. 그 중에 가장 심한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간 흐름의 단절이다. 자연 공간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은 자연 파괴 가운데에서 가장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집은 안 지을 수도 없다. 집을 지으면서 이 자연의 치명적인 파괴를 어느 정도 보완해 주는 것이 자연의 공간에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는 생명력 환원이다. 옛 조상들은 이 점을 깊이 유념하면서 집을 지었다는 것을 전통 건축을 답사하면 쉽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공간의 유통이다. 시각적인 유통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소통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원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누각(樓閣)이며 대청마루이다. 우리 나라 누각 건축에는 거의가 창과 문이 없이 사방을 틔워 놓았다. 대청마루에도 대부분 앞쪽에는 문을 달지 않는다. 그리고 뒤쪽에는 대개 큰 판문(板門)을 달아 필요할 땐 항상 개방이 가능하도록 해 두고 있다. 이는 곧 자연 공간의 흐름을 차단에서 개방으로 유도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다.

우리 나라 건축물에는 유난히 창과 문이 많다. 건축에서 문이란 사람의 통행을 위해 설치되고, 창은 공간의 흐름을 단절하지 않으려고 만든 것이다.

서양 건축과 달리 우리 나라는 목조가 주류를 이루어 집의 골격이 거의 나무를 다듬어 짜 맞춘 가구식(架構式) 건축이다. 그런 까닭에 자유자재로 문과 창을 낼 수 있다. 꼭 필요한 곳을 제외하고는 벽으로 막지 않고 창과 문을 둔 것이 우리 전통 건축의 한 특징이다. 이는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생명력 환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간이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집도 숨을 쉬어야 한다는 믿음이 옛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이러한 생각이 집에도 최대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실천으로 나타난 것이다. 대부분의 옛 집은 돌과 나무, 흙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숨을 쉬고 있다.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으로 막혀진 공간에서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콘크리트 재료의 밀폐된 공간은 생명력이 없는 공간, 즉 죽은 공간과 다름없다.

방음과 보온을 위해 공간의 완전 밀폐를 제일주의로 삼는 요즘,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옛날에는 요즘과 같은 재료가 없어 창호지를 창과 문에 사용했겠지만 창호지는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해 공기의 흐름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경험한 사람이 많겠지만 옛날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후 다음날 머리가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 밀폐된 아파트에서 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죽은 공간과 산 공간의 차이 때문이다.

죽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환풍기를 달고 냉방기, 온풍기, 공기청정기 등을 달아 인공호흡기로 죽은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온대 지방에 속한다. 한옥의 대청마루는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대부분의 한옥에는 대청이 있고 그 공간은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마루는 지상에서 약간 띄워져 아래로 공기가 통하고 마룻바닥은 널판으로 짜여져 약간씩 틈새가 있게 마련이다. 이 같은 구조는 마루에 누우면 앞과 뒤, 그리고 밑으로부터 공기가 순환되도록 해 준다. 그래서 한여름을 시원하게 보낸다.

또 대청마루 앞마당에는 되도록 나무를 심지 않고 뒷마당에 나무를 심는다. 이는 앞마당과 뒷마당의 기압차를 이용해 뒤쪽의 신선한 바람이 앞마당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좋은 예를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경판전 건물에서 볼 수 있다.

경판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보관하기가 쉽지 않다. 비록 창고 건물이기는 하지만 경판전은 이 같은 필요에 맞도록 특수하게 건축됐다. 앞쪽은 탁 트인 공간이고 뒤쪽은 나무가 울창한 계곡으로 되어 있다. 한옥의 대청에서 얻은 경험을 지형적으로 최대한 이용하는 한편, 창문도 대청의 설치 원리에 따라 가장 적절한 크기로 설치함으로써 건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 같은 연유로 세계적인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생명력을 갖고 잘 보존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찰 배치를 보면 앞은 확 트인 공간이고, 뒤쪽은 구릉이나 계곡을 배경으로 삼고 있고 법당 앞에는 누각 건물이 많다. 이 배치의 원리도 곧 살림집의 대청마루 설치 이론과 상통한다. 즉 법당에 생명력을 넣어주는 효과이다. 그래서 누각에는 원래 문이나 창을 만들지 않고 공간이 연속되도록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법당 뒷벽에는 반드시 판문을 설치해서 앞과 뒤가 막히지 않도록 했다. 요즘 법당이 춥다고 뒤쪽 창과 문을 폐쇄하거나 누각을 막힌 공간으로 변형시키는 무모한 일들이 가끔 있는데 이는 원래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일부 사찰에서는 이 같은 건축 구조의 임의 변경으로 오랫동안 보존되어 오던 법당 내부의 단청이 습기로 얼룩지고 벗겨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해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휴식의 공간, 우리의 활력을 재충전시켜 주는 살림집을 비롯, 일터로서의 생활공간인 건물에 생명력을 넣어주는 일은 곧 자연의 작은 부분이기도 한 우리들 인간에게 생명력을 환원시켜 주는 일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적절한 공간 분할

옛 선조들은 집을 지으면서 건축의 공간을 이상적으로 분할하여 사용하였다. 사사로운 살림집으로부터 궁궐, 사찰, 문묘, 향교, 서원 등 모든 건축물의 공간을 분할, 위계(位階)와 질서를 분명히 했다. 살림집에서는 남녀의 공간이 있는가 하면 상하의 공간, 계절에 따른 공간이 각 기능에 따라 배치되고 이들 공간들은 서로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도록 동선(動線) 흐름의 원활을 꾀했다.

주거공간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안채를 중심으로 바깥주인의 사랑채, 안주인을 돕는 행랑채, 바깥일을 돕는 문간채, 조상을 모시는 사당 등이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서로 다른 공간은 끊기지 않고 동선의 흐름이 원활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공간들은 그 위치에 있어서도 일정한 배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늘 사용하지는 않지만 조상의 공간인 사당은 다른 공간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될 수 있는 한 맨 위쪽에 자리잡도록 배치한다. 안채는 중심부이면서도 가장 햇살을 잘 받는 양지에 두고 집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배치하는 한편, 문간채로부터는 가장 깊숙한 곳에 두어 외부인의 접근이 어렵게 되어 있다.

사랑채는 문간채 가까운 곳에 두어 외부인의 접근이 손쉽도록 하는 한편 바깥주인이 은밀하게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연결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다. 이러한 조건을 잘 조화시킨 집이 훌륭하게 배치된 집이다. 소위 양반집이라 부르는 집들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도 배치의 원리는 주거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찰에서의 위계 질서는 더욱 철저하다. 사찰에서의 공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주공간에는 부처님 공간인 상단이 있고, 다음의 중단에는 종(從)된 위계에 해당하는 불전, 그리고 하단에는 부속건물을 배치하였다.

이 같은 배치가 가장 두드러진 곳이 궁궐이다. 궁궐의 공간 분할은 엄격하여 구역의 경계를 대부분 회랑으로 구분 짓고 있다.

궁궐 역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정무공간이고 두 번째가 생활공간, 세 번째가 휴식공간이다. 또 정무공간은 주종(主從)을 뚜렷하게 나누어 의식을 위주로 하는 공간과 실제 집무공간으로 구분하며 생활공간 역시 남성의 공간, 여성의 공간 그리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구분하고 그 구역은 회랑이나 담장으로 엄격히 나누었다. 휴식공간도 외래객 접대의 공간과 사적인 휴식과 자연을 즐기며 심신의 피로를 푸는 공간으로 구획하여 철저하게 이들 공간의 활용을 구분하였다.

이 같은 절도 있는 공간의 분할과 이 속에서의 생활은 국가의 위엄과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규범이 되었다. 집은 사람이 짓지만 결국 그 집은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 바로 옛 선조들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좋은 집에서 좋은 자손이 나고, 나쁜 집에서 나쁜 자손이 나온다는 말도 생겨났다.

건축은 회화나 조각품처럼 감상하고 싶은 사람만이 제한된 장소에서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고 늘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보기 싫든 좋든 간에 보아야 하는 그런 작품이다. 그래서 건축은 좋은 환경도 만들고 나쁜 환경도 만든다. 아무렇게나 집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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