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Home  정각도량   

 특집/ 선재들의 축원문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최정자/ 사회과학대 경제학 전공

 


동악이 온통 풍요로움의 향연으로 가득하던 새 천년 가을날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높푸른 하늘, 예쁘게 물든 담쟁이덩굴, 모과나무, 대추나무, 감나무는 여름내내 땀 흘린 결실을 매달고 풍요로움을 전해주는 그런 때에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제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새 천년에 만난 새 인연에 저는 몸둘 바를 모르고 허둥대곤 했습니다. 나의 아픔을 다 감싸 안고도 남는 넉넉함이 저를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도서관에 앉아 있을 때에도 햇빛이 그리워 햇빛을 찾을 때에도 언덕을 허덕이며 오를 때에도 저는 항상 선생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철없는 저의 헤매임을 보시고는 조용한 미소로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 아픔없이는 성숙도 없는 것이니 잔잔한 물결을 부러워 하지 말고 많이 모색해 보라고 말씀하신 선생님…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가을 학기가 깊어가는 어느날 수업을 마치신 선생님께서 넌지시 시집 한 권을 제 손에 쥐여 주셨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라는 시집이었습니다. 시집을 받아 들고 잠시 아련함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를 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의 나의 꿈인 시를 쓰고 싶다는 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는 챙겨 주신 자상함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밤새워 내린 가을비 속속들이 울음 우는 들녘/푸르게 푸르게 젖어드는 이/내 그대 가슴에 들게 하여 나를 적시는 이/나보다 더 내 속을 잘 아시는 이//불을 내면 불을 끄다, 물에 타오른다.(선생님의 시 내 어린 왕자에게 1중)

시집을 받아들고 곧 바로 읽어 내린 시에서는 선생님의 생활이 그대로 보이는 듯 했습니다. 50여 인생의 시간을 정갈하게 지내오신 선생님의 모습에서 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선생님처럼 곱게 단풍들어 자기 색깔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들의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시를 낭송해 주시던 선생님, 몸이 불편하셔서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수업을 거르지 않으시던 선생님, 장충 공원에서 별을 보면서 인생을 얘기해 주시던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만남의 시간이 길어야만 서로를 잘 알 수 있다는 저의 통념을 여지없이 깨어 주셨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더 늦어지기 전에 시작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라고 하시면서 인생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십 년만이라도 하고 죽을 수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냐고 말씀하실때 저는 경기를 일으킬 뻔했습니다.

저는 왜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았을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 왔는지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습니다. 밤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었고 그저 끌려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없는 빈 껍데기 인생이었습니다. 내가 없는 나는 공허한 몸짓을 하며 허무로 끌려 가기도 하고, 이런 인생이 싫어져서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몸짓도 나를 위로해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우리 학교 선배님이시고 미당 선생님의 제자이시고 불교를 공부하고 싶어하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쩌면 내가 하고 싶어하는 길을 그대로 걸으셨는지 정말 부럽기만 하였습니다. 사람들마다 힘들지 않는 사람이 없고 나름대로는 모두 자기에게 지워진 멍에가 있다고 하시면서 시(詩)가 쓰고 싶다면 정신의 지평부터 넓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를 쓰는 요령만을 배워서 시작(詩作)을 하다보면 오히려 영혼이 피폐해질 수 있고, 시의 생명력도 길지 않을 수 있다는 염려를 보여 주셨습니다. 마음 공부가 된 시(詩)쓰기가 될 때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도 소생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저는 요즈음 어떤 글도 긁적이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부드러운 가르치심의 소리가 저를 주눅들게도 하였지만 진정 아는 것도, 내 목소리를 내는 것도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일기를 쓰는 것마저도 망설여질 때가 많습니다.

확실히 지난 가을은 제게 있어서 전환기였습니다. 불교를 공부할 것인지 시를 공부할 것인지를 놓고 나름대로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불교학을 공부하기로 정하고 이번 학기에 전공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책상 위에서 향기를 풍기는 모과처럼 속이 꽉 찬 향기로운 삶을 위해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하고 적어 주신 선생님의 말씀이 책상위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저는 매일 아침 등교길에 한강을 건너면서 강 상류에 계시는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강물은 양수리를 거치고 천호동을 거쳐서 제가 건너는 한남대교를 지납니다. 강물이 선생님 안부를 전해주면 저는 즐거운 미소로 강물에 답하고는 바다로 흘러 보냅니다. 저도 큰 바다가 되어 선생님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30여 년만의 폭설이 내리던 날 제게로 전화하셔서 시낭송회에 오지 않겠느냐던 선생님 말씀을 따르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털며 선생님께로 달려 가고 싶었던 저의 마음을 선생님께서 아시고는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눈길을 헤치고 이미 선생님의 옆에서 선생님께서 낭송하시는 시를 듣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저를 오래 오래 지켜 봐 주시고 채찍질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자리를 잡고, 성숙의 열매를 맺고, 나의 향기를 발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10년만이라도 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저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선생님께 꼭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늘 선생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청자가 올립니다.

 


Copyright(c) 1997-2001 Jungga
kwon All Right Reserved.
junggakwon@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