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멋진
신세계
연주회에
가서 직접 듣는 것보다는 CD카세트를 귀에
꽂고 듣는 것에 더 익숙하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E-메일로 이야기하는
것에 더 익숙하고, 산과 들로 소풍을 가기보다는
피시통신에 접속하여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자연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거대한 “가상 공동체(virtual community)”[이
표현은 원래 하워드 라인골드의 책제목이다.
Howard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 Home-
steading
on the Electronic Frontier』, New York
: Harper Perenial, 1993]를 만들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너무 다른 신세계이다.
어떤 이는 이 신세계를 옹호하고, 어떤
이는 강력히 거부하며, 또 어떤 이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제의 삶(real life)과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의 전쟁이다.
낡은 세대는 성능 좋은 ‘속도완충기’를
달지 않고는 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사이보그[cyborg-인간과 기계의
중간물]와 가까이 있는 어린이, 청소년
세대들에겐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가상 공동체
옹호론자들은 정보화사회의 미래에 불길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을 상상의 자유를 두려워한다는
의미에서 모두 “심정적 전체주의자들”이라고
공격한다. 전체주의자는 상상의 자유를
싫어한다. 그래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든
동화책을 불살라 버렸는지도 모른다. 가상
공간은 ‘상상의 자유’,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로 E-메일로 쓰는
편지가 ‘양면 괘지’에 쓰는 것 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상상력’과 ‘친밀감’을
주는가? 실시간에 자판을 두들겨 편지를
쓰는 경우 전통적인 방법보다 더 화려한
문장을 가르쳐 주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상상력을 말살하는 진짜 파시스트는 젊은이들에게
‘책을 덮고 가상 공동체에 접속하라!’고
주문하는 사람들, 상상력처럼 변화무쌍하고
방대한 것의 생존이 과학기술의 성공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II. 타자의
실종과 가상 현실의 탈윤리
정의(正義)는
적절한 결핍이 있는 곳에서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윤리는 적절한 물리적 강제와
부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작동한다. 가상
공간에서는 현실 세계의 이런 결핍과 강제와
부자유로부터 ‘심리적’인 보호를 받는다.
가상 공간에는 자아의 파편화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의무, 책임, 강제)을 망각케 해주는
도착적 쾌락과 유희가 있다. 가상 공간은
무한히 팽창하여 인간의 사회적 한계를
무너뜨리고, 일상의 도덕적 자기규제가
사라진다. 그래서 “가상 공간은 실재
세계의 복잡성과 중력으로부터 이탈하여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고유한 세계가 된다[Kevin
Robins, “Cyberspace and the World We
Live In”, in: 『Cyberspace Cyberbod/
Cyberpunk. Cultures of Technological
Embodyment』, London 1995, p.143].”
그러나
무의식적 환상의 투사로 인하여 가상 공간은
나르시시스적 퇴행을 부추긴다. 나르시시즘은
현실로부터 환상에로 무제한적인 퇴행이기
때문이다. 욕망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상태를 정신병의 중요한 특징이라면, “가상
공간이먀말로 전형적인 정신병적 공간[Peter
Weibel, “Virtuelle Welten : The Emperor’s
New Body”, in: Gotfried Hattinger et.al.
hersg., 『Ars Electronica』, 1991, vol.2
: 『Virtuelle Welten』, S.29]”이다.
버추얼 스페이스에서 타자의 실종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결국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혹은 도덕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타자에 대한 도덕적 신뢰는
연속적인 정체성에 의한 상호관계 때문인데,
수시로 자신을 변화시키는(아이디) 존재는
수상한 자로 다가온다.
로빈스는
가상 현실의 거주자들이 결국 타자의 실질적
독립적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진입하는
상호의존과 책임의 관계를 거부하며, 그러한
한 반사회적이며 반도덕적이라고 단언한다.
‘부유하는 정체성’은 정신분열적 혹은
나르시시스적 영역을 방황하며 제한 없는
자유와 지배의 감성은 탈신체화된 유아론적
정체성에 속한다. 이러한 탈신체화된 정체성이
가상 현실의 사회적 확산을 통하여 사회에
정착될 때 실제의 삶의 공간의 윤리는
치명적이 된다. 가상 공간의 ‘탈타자화된
자아’는 일종의 자폐증이며, 컴섹스의
‘디지털 오르가슴’은 현실 세계의 욕구불만의
투사이며, 더욱 큰 욕구불만으로 귀결된다.
III. 가상
현실의 연대성 : 로빈스와 라인골드
가상 현실에
대한 강한 긍정론을 펴는 하워드 라인골드(Howard
Rheingold)는 가상 공간은 현실 세계에서
점차 상실되어 가는 ‘공동체적 연대’를
회복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삶의 조직은 민주.시민적, 공동체적 삶을
퇴조시키고 있다. 라인골드는 가상 공간이
그런 파괴를 막는 데 사용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푸코의 ‘판옵티콘
메타포’를 원용하여 거대한 감시 체계와,
소수에 의한 정보독점으로 정보화사회에서
오히려 중앙집중적인 권력이 강화되리라는
예견은 60-70년대의 중앙집중식 컴퓨터
시대에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평가절하하고[Howard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
Finding Connection in a computerised
World』, London 1994, p.14], 온라인
공동체는 국가의 국경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발전될 것으로 전망한다.
라인골드는
이런 낙관적인 견해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1) 정보가 광속으로
유통되는 네트워크 내에서 시간 압축이
일어나고, 실시간 쌍방향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2) 근대 산업사회의 도시화로 인한 인간관계의
밀도는 희박하게 되어 왔는데, 광통신으로
더욱 농축된다. 다시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은
그전 농경사회에서처럼 친밀해짐으로써
농경사회적 공동체성이 강화된다. (3)
그러므로 컴퓨터 네트워크로 구성되는
가상 공동체는 사회 재조직의 중심 역할을
한다. 사실 우리는 우연적인 거주지에
살고 있다. 광통신은 이런 자연적, 우연적
요인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구성할 것이다(지금까지의 공동체는 지리적
요인에 의해 제한되었다). (4) 따라서
산업화로 인한 소중한 인간적 가치와 이념들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5) 온라인
공동체는 그러므로 국경을 초월할 수 있고,
국가를 초월하기 때문에 산업사회의 강력한
국가 통제로부터 해방된다. (6) 이제 ‘전지구-시민적
문화’가 온라인 네트워크로부터 창조된다.
이런 견해에
대해 로빈스는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Kevin
Robins, “Cyberspace and the World We
Live In”, p.148]. 몇 가지만 요약하면;
(1) 농경사회적 ‘대면 공동체’가 정말로
좋은 것인가? 가상 공간에서 연결되는
상호작용이 대면적 상호작용과 같은 효과를
갖는가? 가상 공간에서 만나는 아득히
먼 곳, 예를 들면 이름도 얼굴도 그 언어도
모르는 아프리카의 한 네티즌과 더불어
“가족 공동체적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까?
(2) 이런 의미에서 라인골드의 낙관론(혹은
지나친 유토피아니즘)은 복고적이고 보수적이다.
문제는 온라인 공동체에서 우리가 타자와
정신적 유대(육체는 없기 때문에)를 가질
수 있는가 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몸의
유대는 없고, 마음의 유대만 있다. 앞에서
우리가 주장했듯이 가상 공간에서 개인은
‘탈타자성’이 강하게 부각되는데, 거기서
타자와 정신적으로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은 ‘탈타자화된 자아’일지도 모른다.
즉 내가 아닌 내가 나와 더불어 동질성을
느끼는 상태! (3) 온라인 안에서 사회는
투명할 것이며, 강제도, 폭력도, 어떤
소외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상호이해,
조화, 합의가능성만 있다. 그것이 온라인
밖의 불투명성을 제거할 수 있을까? 물론
일생동안 온라인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역적.언어적.민족적
집단생활 공간을 공동체라고 부른다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몸과 마음이
동시에 친밀해지는 공동체를 훼손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과천에 있는 <서울랜드>에
간다. 아름다운 집과 예쁜 정원과 원하는
모든 놀이 시설이 있다. 하나의 이상 도시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는다! 즉
‘사회적으로’ 거주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 공간이 바로 ‘가상 공간’이다. 그곳은
앨도라도[볼테르의 익명소설 『깡디드』에
나오는 남미 어느 곳에 있다는 유토피아
도시.]이지만, 초사회적(asozial)인 도시이다.
입장권을 사고 들어가지만,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임의적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실존으로 내 던져진(in-der-Welt-geworfene)
존재”인 나로서는 땅위에 굳게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롯데월드>, <디즈니랜드>,
<서울랜드>의 입장권은 나를 현실의
삶으로부터 영원히 떠나 보낼 수 없다.
요컨대 현실 공간의 거주자는 공동 운명을
갖는다. 전쟁, 자연재해, 사회적 악덕
등에 대해 공동의 아픔을 나누고, 책임을
공유한다. 언제나 오프(off)하면 이탈할
수 있는 가상 공간은 시뮬레이터에 불과하다.
시간이 정체되어 있는 그곳에는 역사가
없다.
IV. 가상
현실의 윤리학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지금의
인간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주체(예를 들면 사이보그)가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새로운
인간은 현재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아무런
실존적 불안도 없는 완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상 현실 역시 무한히
확대될 것이고, 더욱 많은 긍정적 가능성을
보여 줄 것이다. 역사상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해방, 갈등없는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세상은 어쩌면 새로운
인간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상과학적
예언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언제나 실현되어
왔고, 이론적으로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의 출현과 상관없이,
네트워크 없던 시대의 인간과 가상 공간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는 인간들 사이를
이어줄 윤리가 필요하다. 현재는 일종의
윤리적 진공상태이다. 가상 공동체로 들어간
사람들에겐 어떤 윤리도 필요없다. 윤리라는
것이 물리적 세계(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투와 같은 것인데, 가상 공간에서는
옷을 입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윤리적 공백이 현실 사회로 번져 나와
‘시뮬라크럼의 무도덕’이 현실의 삶에까지
확대, 정당화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현대문화는 제도, 기구뿐만 아니라, ‘자아’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자아는 타자성에
대해 적대적이면서 자폐적, 권력지향적이기
때문에 타자의 윤리를 거부한다. 자아에
대한 관심의 확대가 절실하다. 금세기
초에 후설(E. Husserl)이 ‘순수 자아(reines
Ich)’에 대한 깊은 탐색을 시작한 바
있듯이, 가상 공간에서의 윤리적 행위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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