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Home  정각도량   

불심의 창

"감사와 보시의 신행생활"

장영길/국어국문학과 교수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종교가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선사시대는 말할 것도 없이 기록의 시대만 살펴보아도, 종교를 제쳐 놓고 우리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함부로 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짐작컨대 먼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세련된 종교생활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단지 인간의 지혜가 미숙했던 만큼 종교생활도 다분히 샤머니즘적이었을 것이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생활은 단순히 화를 멀리하고 복을 비는 이른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구복신앙(求福信仰)이 주류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고 종교가 현대화되면서, 구복신앙은 차츰 감사와 보시의 신행으로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종교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 많은 종교 중에서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그릇되게 인도하는 종교는 많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는 그 종교인의 삶의 자세이다.

‘신행행위 따로 일상생활 따로’식의 신행생활이 문제될 수 있으며, 감사와 보시를 모르고 항상 구복만 하는 신앙생활은 더 큰 문제가 된다. 구복신앙이 심화되면 남을 배려하는 보살정신이 발휘되기 힘들다. 구복신앙은 나만 복을 받아 잘 살면 된다는 사고를 낳기 쉽고, 이런 사고는 개인이기주의에서 나아가 집단이기주의를 낳는다. 나의 이웃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런 신행생활은 자칫 우리의 삶을 메마르고 각박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기주의로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나 행위는 다원화된 현대 사회의 질서를 원초적으로 파괴하여, 이 세상을 참혹한 혼란의 상태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우리가 참된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감사와 보시의 행위를 통해서 해야 할 것이다. 감사와 보시의 신행생활을 거창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일상사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와 보시의 신행생활을 실천할 수가 있다.

나를 필요로 하여 찾아오는 동료, 선후배, 제자,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세상사로 나를 찾아오는 귀치 않은 사람에게까지도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며 차 한 잔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이미 훌륭한 감사와 보시의 신행생활이 된 것이다.

비록 나에게 주어진 재능이 지극히 미소(微小)하다 할지라도, 주어진 그 재능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이웃의 사람과 짐승에게 또는 더 나아가 모든 생물(生物)들에게까지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보시행(布施行)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훌륭한 신행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나는 등교하느라 시내버스를 탄 적이 있다. 입춘을 넘겼지만 아직 아침 공기는 쌀쌀했다. 버스가 황성동 주차장에 섰을 때, 60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황급히 버스를 탔다. 차비를 내려고 지갑을 열었으나 만원권 지폐밖에 없었다. 참으로 낭패한 표정으로 그 할머니는 기사 아저씨에게 만원권 지폐를 내보이며, 서둘러 나오느라 잔돈을 못 챙겼다고 사정 얘기를 했다. 그러나 그 기사분은 퉁명스럽게 잔돈으로 바꾸어서 내라고만 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 할머니는 점점 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이리 오세요 할머니.”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살펴보니, 어떤 중년 부인 한 분이 지갑에서 천원권 지폐 한 장을 꺼내 할머니에게 건네면서 차비를 내시라고 했다. 순간 나는 목이 메여옴을 느꼈다. 얼마나 따뜻하고 살맛 나는 순간인가? 차비 700원, 그것이 비록 적은 돈이라면 적다고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 중년 보살님의 마음 씀씀이는 참으로 얼어붙은 대지를 녹일 수 있는 숭고한 보살행인 것이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이 작은 동화 같은 장면은 그 날 이후 내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우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사계절의 풍경이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벚꽃이 만발하는 봄의 풍경, 그리고 멀리 강남으로 겨울 나들이 갔던 하얀 왜가리들이 우리 캠퍼스 동산을 다시 찾아오는 오월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부처님 오신날 연등이 어둠을 밝히는 이즈음의 캠퍼스 야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어느 외국 대학 교환학생은 이 풍경에 매료되어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우리 캠퍼스 정각원 아래 있는 작은 연못은 우리들이 자주 들러 하루 일과의 피로를 푸는 곳이다. 본관건물을 짓기 위해 발굴작업이 끝난 운동장 주변이 다소 어수선하지만, 이 연못에 연꽃이 피면 굳이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 황홀한 자태가 왜가리 보금자리가 있는 주변의 자연과 어울려 그대로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청정한 세계로 이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바로 그 왜가리들의 보금자리 근처에 기숙사 증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머잖아 강남으로 나들이 갔던 왜가리들이 돌아와 공사로 어수선해진 자신들의 보금자리 주변을 보고 얼마나 어리둥절해 할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제발 딴 곳으로 이사가지 말고 약간 비킨 숲 속에 둥지를 다시 마련하고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해주길 기원해 본다. 나무 관세음보살.

 


Copyright(c) 1997-2001 Jungga
kwon All Right Reserved.
junggakwon@hanmir.com